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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소설 좋아하세요?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

by 시트러스

1. 슛업: 달에게 말을 걸다

"농구... 좋아하세요?"

채소연이 강백호에게 물었을 때, 슬램덩크는 시작되었다.


누군가 내게 다가와,

"공포 소설... 좋아하세요?" 묻는다면

그런 아름다운 장면은 연출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기쁨에 눈을 희번덕 거리며

"왜요? 제가 공포 소설 좋아하게 생겼나요?"

"... 실례했습니다."

렇게 대화는 종료될 가능성이 크다.


2. 페이드 어웨이: 스산한 빛의 궤적

가을비가 며칠 내리더니 오랜만에 달이 휘영청 밝았다.

싸늘한 달빛이 스며드는 공기 낙엽 냄새가 묻어났. 가로수 아래로 떨어진 잎은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달이 뜬 밤은 기묘한 느낌을 준다.

원래라면 어둠 속에 적당히 숨어들었을 풍경도 낱낱이 드러난다.

숱한 예술가들이 달빛을 찬미했지만, 나는 그 찬란함에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휘청이는 그 빛은, 아름다움보다 묘한 불안을 불러온다.


3. 드리블: 피아노 아래 흐르는 달

이 밤, 나는 은빛 도는 창가에서 좋아하는 책을 집어든다.

배경 음악으로 달과 관련된 곡을 고른다.

가슴을 조용히 내리누르는 듯한 피아노 음률.
‘달빛’이라는 이름을 단 곡,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실제로는 베토벤이 붙인 제목이 아니라고 한다.
그럼에도 나는 그 선율이 달빛의 진짜 본성에 더 가깝다고 느낀다.


드뷔시의 "달빛"은 차갑고 청명한 새벽 공기처럼 흘러든다.

좀 더 좋아하는 것은 역시, 베토벤의 곡이다.

달빛은 어둠을 물리치는 빛이 아니라, 어둠의 얼굴을 드러내는 빛이다.

창밖의 달빛이 피아노 건반 위에 걸린다.

그 빛이 한 음 한 음 누를 때마다, 이야기와 현실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4. 풀코트 프레스: 어둠을 읽는 사람

오늘 고른 책은 스티븐 킹의 신간이다.

나는 국내에 출간된 그의 책을 '모두' 읽었다.

짧은 문장이지만 그 안에는 수백 권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는 아직도, 여전히 그 공포를 써 내려간다.


왜 무시무시한 을 쓰냐고 묻는 말에 킹은

'나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답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왜 읽느냐면, 그런 글을 읽지 않을 재량이 내게는 없다.


공포 소설의 힘은 '상상력'에 있다. 우리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그러나 왠지 일어날 것만 같은 이야기들.

나는 그런 '이야기'에 빠져든다.


5. 픽 앤 롤: 공포의 패스를 이어받다

최근에는 친한 작가님의 추천으로 할란 엘리슨의 책을 읽었다. 작가 소개 문구부터 이미 '썩은 맛이 줄줄 나는' 작품 모음집이었다.

역시 나의 재량권은 멀리 날아간 채, 이야기 속으로 속절없이 끌려간다.

초자연적인 존재는 장르적 장치로서 기능하고, 상황과 분위기에서 오는 공포가 압도한다.


<제프티는 다섯 살>,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를 추천한다.

엘리슨을 '천재, 괴물, 전설'이라고 칭한 그의 전기 영화에 동의하는 바다.


배경음악은 쇼팽의 "녹턴"으로 이어진다.

밤의 음악이라는 이름 그대로 녹턴은 달빛처럼 조용히 번진다.

사라지듯 시작해, 물결치듯 흘러와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린다.

쇼팽의 선율은 언뜻 고요해 보이지만, 그 고요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잠겨 있다.

그 조용한 떨림이, 오늘의 이 서늘한 감상과 맞닿는다.


6. 리바운드: 그림 속으로 떨어지다

마지막 읽은 책은 공포 소설에서 리바운드된 김혜리 기자의 『그림과 그림자』이다.

달빛을 닮은 그림이 생각나 책을 펼쳐 들었다.

녹턴과 그림의 제목이 같다.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청색과 금색의 야상곡: 낡은 배터시 다리』

그림 속 밤은, 마치 꿈속의 강가 같다.

짙은 푸른 안개가 강 위를 덮고, 다리는 검은 실루엣처럼 허공에 걸쳐 있다.
물안개 속에서 반짝이는 금빛 불빛 몇 점이 희미하게 번지며,
보이지 않는 달빛이 그 모든 장면을 스르륵 덮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달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문장으로 적어 내려간 그의 글은,

한동안 달의 대한 나의 감상을 청색과 금색으로 바꿔놓았다.


7. 버저비터: 달빛이 멈춘 순간

어둠을 비추는 감각의 조각들을 꿰어, 달의 한밤중을 짓고자 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들의 글과 그림, 음률은 달빛처럼 나를 비추었다.

공포는 무서움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이해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어디선가 늑대울음소리가 길게 들려오는 듯하고,

또 숨결이 식은 물결이 일렁인다.


계절이 지나가는 밤.

어둠 속에 있어야 할 감정들이,

유난히 밝은 가을달 아래, 책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묻혀 있던 상념들도 그 흐릿한 빛 아래서 꿈틀,

느릿하게 창백한 날개를 편다.


달은 늘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무자비한 밤의 여왕이다.

그 빛 아래서, 나는 나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본다.


8. 앨리웁: 달빛을 향한 마지막 패스

어둠을 물들이는 그 빛은, 끝내 따뜻하지 않지만 나는 늘 매혹당한다.

달은 밤의 감정을 되비추는 거울이자, 아름다움과 불안을 동시에 씌우는 베일이다.

달빛은 늘 나의 시선을 블록 하려 하지만, 나는 다시 슛을 던진다.

이번엔 마음 깊은 곳을 향해.


여태 읽은 공포 소설책을 쌓는다면 농구골대만큼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더 읽고 싶다.

저 맑고 시리게 높이 뜬 달빛에 닿을 때까지라도.

그때쯤이면, 달은 또 다른 이야기를 내게 속삭일 것이다.


"공포소설... 좋아하세요?"

내 대답은 강백호와 같다.


"정말 좋아합니다."

달빛처럼 차가운 그 이야기들이, 결국 나를 생동하게 만든다.




* 이 글의 소제목은 로버트 A. 하인라인의 소설,

The Moon Is a Harsh Mistress에서 차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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