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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도둑

네 옷은 내 옷, 내 옷은 내 옷

by 시트러스

1. 소소하지만 확실한 횡령

"가스나, 이거 또 내 옷 입고 나갔네!"

몰래 현관문을 닫고 나왔는데 집에서 오빠야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척을 숨기고 살금살금 내뺐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옷에 욕심이 많았다. 한 번씩 오빠 옷도 훔쳐 입을 정도였다. 그때 그러지 말걸. 도대체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시절 이야기를 한다. 이번 추석에도 빠지지 않았다.


새언니 앞에서도, "그때 00이가 내 옷 맨날 입고 댕겼다."

남편 앞에서도, "그래서 그때 00이가 툭하면 내 옷 입고 나가서..."


30년 뒤에도 할 기세다. "어, 그래 그래! 그때 너희 할머니가 이 할아버지 옷을..."

나는 그럼 그때처럼 속으로 꿍얼거릴 것이다. '한 두 번 입은 거 가지고. 아, 세 번. 뭐... 네 번. 맨날은 무슨.'


2. 출근보다 힘든 건, 오늘 뭐 입지?

요즘은 물론 내 옷만 입는다. 몸뚱이는 하나인데, 사 모은 옷은 또 왜 이리 많은지.

그래도 출근 전날만 되면 매번 같은 고민이다. "뭐 입고 가지..."


가을은 혼란의 계절이다. 길에는 그야말로 아무 옷의 향연. 멋지게 트렌치코트에 스카프로 멋을 낸 사람. 한낮은 아직 더워 반팔과 반바지 차림. 기온이 뚝 떨어지는 밤에는 플리스도 슬슬 등장하고 조금만 더 지나면 경량 패딩도 하나, 둘 눈에 띈다.


폭풍처럼 몰아쳤던 더위가 조금씩 자리를 비키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면 옷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가슴이 두근거린다. 슬슬 여름옷을 정리하고 가을 옷 컬렉션을 준비하는 계절이다.


3. 신뢰템을 소개합니다

살아오며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거쳐 이제는 어떤 옷이 내게 어울리고 어떤 옷을 사야 할지 라인업이 정해졌다. 내가 편애하는 옷은 캐시미어 니트류다. 폭신하고 가볍게 몸에 착 감기는 캐시미어는 늘 안전한 선택지다.


온갖 굵기와 간격, 색색깔의 스트라이프 티셔츠도 좋아한다. 남편은 "그 옷, 옷장에 있는 거 아니야?" 하지만 모르시는 말씀, 하늘 아래 같은 스트라이프는 없다. 게다가 "또 옷 샀냐", 추궁할 때 "아, 있던 거라고!" 하며 빠져나가기도 좋은 효자템이다.


상하의 중 하나는 무채색을 고르는 편이므로, 나머지는 경쾌하고 밝은 색을 입는다. 지나치지 못하는 조합은 흰색과 베이지, 파랑과 갈색. 압도적으로 많은 색은 역시 네이비. 요즘 고민하고 있는 옷은 틸블루의 인조 스웨이드 H 라인 스커트이다. 좋아하는 색으로만 위아래로 입으면 광대꼴을 못 면하기 때문에 늘 주의한다.


한때 온갖 종류의 스카프와 파시미나를 두르고 다녔는데 어쩐지 날이 갈수록 작은 방도가 눈에 들어온다. 스카프를 한다면 트렌치에 어울리는 밝은 크림색에 포인트 컬러로 네이비가 들어간 것. 꾸안꾸가 추구미지만 이상하게 스카프를 하면 꾸꾸꾸!로 보이는 것 같아 열심히 매고 나갔다가 슬그머니 풀어버리는 요즘이다.


4. 아무 데도 안 가지만, 옷은 입고 싶어

책 읽고 글 쓰는 것만큼 좋아하는 것이 옷 구경이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고심해서 옷을 입고 가는 곳 이래 봤자 매일 학교, 도서관, 동네 커피숍이다. 퇴근할 때쯤이면 셔츠는 소매가 접혀 올라가 있고, 스카프는 팽개쳐서 가방에 들어가 있다. 드잡이 하고 싸우다 나온 사람도 아닌데 여간 사나운 기세가 아니다.


그럼에도 옷을 고르고, 정성스레 펴서 입는 과정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색을 고르고, 내 취향을 살피는 순간은 오롯이 1인분의 기쁨이다. 디자인과 소재보다는 폭염과 에어컨 바람에 맞섰던 전투복의 계절이 끝나간다. 계절이 잃어가는 따뜻함을 색감으로 채우고, 내게 폭닥함을 입혀주는 일. 그건 오직 가을만이 건넬 수 있는 선물이다. 코끝이 시리도록 설레는 이유다.


5. 커피 한 잔 룩, 범행 예고

다시 생각해 보니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오빠 옷을 훔쳐 입을 것 같다.

하얀색 면 칼라에 줄무늬가 들어갔던 그 럭비티는 도저히 못 참을 것 같다.

우리 집 오빠는 앞으로도 경로당에 갈 때 옷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오빠야, 기억해라.

경로당룩도 예외일 수 없다.

네 옷은 내 옷이고, 내 옷은 그냥 내 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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