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회의장 중앙에 안내되어 그곳에 앉았다. 나를 빙 둘러싸고 수많은 학생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장인 도조 선배가 입을 열었다.
“먼저 사과의 말씀 전합니다. 지금 바로 결정해야 할 사안에 대해 여러분의 의견을 수렴한 후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고자 긴박하게 회의를 열게 되었습니다. 양마리 학생과 관련된 교내 학생들의 태도, 생활, 사건, 동아리 등의 변화에 대한 의견이 있으신 분들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갑자기 내 이름이 왜 나온 건지 어이가 없었다. 지금 이럴 시간이 없는데 내 손에 들린 원고를 어서 연출가에게 전해줘야 하는데…… 마음이 타들어갔다. 학생부 소속 겸 부의장 네스티가 일어선다.
“학생부입니다. 양마리는 제파트에 출입증 없이 출입했던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상담실, 수남샘 기숙방에 새벽 시간에도 들낙거리는 모습을 봤다는 목격자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교내 규칙을 어기는 행동에 대해 양마리는 심히 반성해야할 것으로 보입니다.”
규칙을 어긴 건 사실이었다. 할 말이 없었다. 나를 보며 네스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참자. 지금은. 그리고 어서 이곳을 나가자. 제발!
“죄송합니다. 반성하겠습니다. 그리고 반성문 쓰라면 쓰겠습니다. 근데…… 이거 언제까지 해요?”
“양마리 학생은 조용해주세요.”
“빨리 좀 끝내면 안되나요?”
“조용히 하라니까.”
“후우…….”
회의는 계속되었다.
“도서부입니다. 율리아샘과 관련된 모든 억측과 소문들을 내고 다니는 사람에 대해 엄중한 처벌을 내려주기를 바랍니다. 특히 말룡샘과 실제 커플이 될 거라고 말하고 다니는 인간이 있는데 제발 그런 초딩이나 하는 짓을 멈추게 해달라는 겁니다. 말룡샘과 율리아샘을 함께 언급하는 것 자체가 저희로써는 매우 불편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며 선생님의 개인적인 취향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치악고 문화가 어서 빨리 형성되기를 간곡히 바라는 바입니다.”
도서부는 율리아샘의 팬클럽이나 다름이 없다.
“운동부입니다. 어이가 없네요. 우리야말로 율리아샘과 말룡샘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이제껏 학생부는 뭘 하고 있었나요? 이번 건에 대한 학생부의 늦은 대처와 안일함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는 바입니다.”
운동부는 말룡샘을 전적으로 믿고 따른다. 도서부와 운동부의 팽팽한 신경전…… 중간에 낀 채 가슴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선도부에서 말씀드립니다. 학생들의 복장에 대한 이상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현재 말리아, 라는 신조어가 교내에서 암암리에 돌아다니고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복장을 통해 드러내고자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것이 양마리 학생과의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조금 더 사실을 조사하고 증거들을 수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말리아들은 양말을 뒤집어 신는데요. 예의에 어긋나는 바가 아닐 수가 없고 그것에 동조하지 않는 학생들에게까지 피해가 가는 행동이라 여겨집니다.”
회의장 안에 있던 누군가가 소리친다.
“말리아들의 복장 상태에 대한 감독을 철저히 하고 따르지 않을 시 엄중한 처벌을 해달라고 강권하는 바입니다.”
여기저기에서 동의한다는 말이 터져나온다. 멀리 검정색 모자가 눈에 들어온다. 낯익은 모자라 생각되었는데 얼마 전 나와 추격전을 벌였던 제파트 요원이었다. 그가 일어선다.
“제파트입니다. 이건 양마리 학생과 직접적으로 상관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저희로써는 심히 우려되는 부분이라 말씀드립니다. 주간 이말년. 그 발행물에 관해 이제는 학교 측면에서 제대로 된 단속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학생들이 주간 이말년을 보고 어이 없는 추측들을 하는 가운데 추측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학생들이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교내에서 공식적으로 발행되는 전자신문을 믿지 않고 이런 것들에 더 신뢰를 보이는 조짐이 무서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방청객에서 누군가 일어선다.
“말씀하세요.”
“제파트에서 좀 더 신뢰성 있는 정보를 찾기 위해 노력할 생각은 없으신가요?”
누가 저런 용기 있는 말을 하다니 반가운 마음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유가였다! 나는 모깃소리만하게 중얼거렸다.
“맞습니다. 맞고요.”
“아니, 지금 무슨 말씀이세요? 주간 이말년을 그럼 이대로 놔둬야 한다는 얘긴가요?”
“이제껏 주간 이말년이 예측해서 맞춘 게 한두 건이었나요? 이번에도 제파트에서는 미호와 리엘의 주인공이 반드시 유가락샘과 서수남샘이 될 거라는 뇌피셜을 내놓으셨잖아요. 정말 완벽하게 틀린 뇌피셜이 아닐 수 없어서 매우 유감스러웠습니다만.”
“주간 이말년 읽으시나보죠?”
“교내 전자신문은 그럼 왜 있어야 한다고 보시죠?”
“주간 이말년 발행인과 관계가 어떻게 되시나요?”
“혹시 이말년이세요?”
여기저기서 유가에게 질문들이 쏟아졌으나 의장은 손을 들고 회중을 진정시킨다.
“그만하세요. 조용히 하세요. 다른 의견 없습니까?”
“정치경제토론부 동아리에서 말씀드립니다. 요즘 신생 동아리 창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소생신청서를 제출하겠다는 동아리도 많고요. 그것이 양마리 학생과 어떤 상관이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확실한 건 무모한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겁니다. 양마리 학생 같은 학생들이요…… 교내 면학에 대한 의지를 높이는데는 아무 소용도 없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양마리 학생은 가책을 느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회의는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이 모든 것에 내가 어느 정도 일조한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말에 모두 동의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죽은 동아리를 살려보겠다는 그들의 의지까지 여기서 함부로 판단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의장이 내게 물었다.
“양마리 학생은 동의하십니까?”
밑을 내려다보았다. 운동화 끈이 풀려 있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풀린 운동화 끈을 다시 조여 묶었다. 그리고 일어나 의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니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당황스럽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회의장은 정적 속에 잠긴다. 순간 누군가가 번쩍 손을 치켜든다. 방청객에 앉아 있는 동성이었다. 그 옆에 사마귀도 보였다. 그들 모두 지루한 듯 어서 이곳을 나가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의장이 동성이를 보며 성가시다는 듯이 미간을 일그러뜨린다.
“뭐요 뭐?”
“화장실 좀…….”
“그걸 왜 손을 들고 말합니까? 그냥 나가세요.”
동성이 쭈뼛거리며 일어나더니 회의장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유가가 동성이 보다 먼저 밖으로 나가버린다. 체육관 무대에서는 노래 컨테스트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노랫소리가 이곳 회의장까지 흘러들어온다. 빠른 비트와 러블리한 멜로디의 컴온마이럽. ‘이건 아니잖아. 이건 너무 불공평해. 모든 것을 갖춘 그대. 단 한 번의 눈빛으로 내 심장을 가져간 너. 나를 흔들지는 말아줘. 제발 내게 다가와 욤베베. 욤베베…….’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여기 있는 사람 모두 단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지금 노래를 부르는 간드러진 목소리의 주인공은 수미수진수린. 3학년 여신 선배 그녀들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마귀가 스크린 전원 버튼의 스위치를 누른다. 회의장 대형 스크린에 체육관 무대 현장이 띄워진다. 수미수진수린의 무대를 보며 절로 어깨가 들석인다. 의장이 당황스러워하며 어서 스크린을 끄라고 하지만 누구도 스크린을 끌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어서. 집중하세요. 여기. 여기. 다들 여기 보라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여기 모인 사람 모두 알 것이다. 눈은 이미 내 것이 아님을. 아무리 딴 곳으로 돌리려 해도 돌려지지 않음을. 여자인 내가 봐도 설레는 그녀들. 그녀들이 팔을 한 번 들 때마다 발로 스텝을 밟을 때마다 선후배 할 것 없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표정들이다.
……스물스물 한 두명씩 회의장을 빠져나간다. 다들 좀 급하신 것 같다. 수미수린수진의 무대를, 이 역사적인 순간을 현장에서 감상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은 절대 스스로에게 용납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회의장을 빠져나가는 선후배에게 동성이는 고개를 숙여 예의를 갖춘다.
“안녕히들 가세요. 네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끊임없이 줄줄이 회의장을 빠져나간다. 사마귀가 나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양마리 뛰어!”
나는 원고를 손에 들고 있는 힘껏 뛰어간다. 바람처럼 빛처럼 달려간다. 뒤에서 학생부 몇 명이 내게 달려들었지만 간만의 차이로 그들은 나를 놓쳐버린다. 전력질주로 체육관에 도착. 체육관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원고를 무대 뒤편 상황조정실에 건네줘야만 했다.
“양마리!”
가까운 곳에 연극 무대 스텝인 유가가 서 있었다. 유가가 내게 손짓을 한다. 나는 한 걸음씩 걸음을 내딛는다. 누군가 나를 할퀴고 밟고 치고 가로막는다. 멈추지 않고 인파를 뚫고 나간다. 있는 힘을 다해 나는 모든 것을 뛰어넘는다. ……유가! 내가 유가에게 원고를 넘기자마자 유가가 무대 뒤편으로 달려간다.
……마침내 로미호와 줄리엘의 연극 무대의 막이 오른다.
살인병기 미호. 갓난 아기때부터 그는 전쟁에서 오로지 적군을 죽이기 위해 키워진다. 그는 무기 하나 없이 맨손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가능하다. 전쟁 중에 그가 길을 잃고 헤맨다. 숲속에 혼자 쓰러져 있는 미호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는 리엘. 리엘의 작은 숲속 집으로 미호는 몸을 피한다. 미호는 자신에게 아무 대가 없이 친절을 베푸는 리엘에게 서서히 마음이 열린다. 리엘을 더 이상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한 미호는 자신이 살인마라고 고백한 후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미호 : 나는 이제껏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죽였어요. 제가 존재했던 이유는 하나였어요. 살인.
리엘 : 저도 마찬가지에요. 다만 마음으로 그것을 했을 뿐입니다. 수도없이 셀 수 없을 만큼 저는 아버지를 오빠를 마음으로 살인한 사람입니다. 저 때문에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오빠도 저를 떠났습니다. 당신과 저 우리 둘 중에 누가 더 나쁘다고 생각하나요?
미호 : 당신과 나는…….
리엘 : 다르지 않아요.
리엘과 미호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더욱 가까워진다.
미호 : 리엘, 당신이 그것에 매료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당신이 그것을 사랑하는 이유가 저는 궁금해요. 당신이 이름도 모르는 식물 넝쿨을 보며 그것을 내 애기, 라고 칭하는 이유가 뭔지 알기를 원합니다. 그것과 당신은 무슨 사연이 있나요. 당신이 그것을 그토록 진한 애정으로 부를 수 있게 된 이유가 뭔지 저는 알고 싶습니다. 시장에서 천 원에 주고 산 수세미가 왜 당신의 눈 속에서는 그토록 곱게 보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누군가 대충 만들어 내다 판 그것에 무슨 대단한 색감이라도 있다는 듯 보는 것이 대체 어떤 의미인지 저는 알고 싶어요. 그것이 갖고 있는 특별함이 무엇인지 저는 이해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 당신이도록 만드는 뭔가가 되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당신이 당신되게 하는 작은 퍼즐 조각이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의 근원에 접근하도록 허락할 것이기 때문에. 저는 그것이 갖고 싶은 거예요. 그것을 소유하고 싶은 겁니다. 70억 인구 중에 단 한 사람. 당신이라는 사람을 배울 수 있는 길을 알고 싶습니다. 그것은 전혀 가본 적 없는 길이고 새로운 방식이고 이해해본 적 없는 깊이고 도달해본 적 없는 넓이. 내 모든 힘을 다해 당신을 배우고 싶습니다. 내 모든 힘을 다해 당신에게 도착하는 길을 내고 싶어요. 우리의 모든 것이 소멸할 때 그것만이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 그것은 가장 작은 알맹이로 남아서 우리가 이 지구상에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무언가가 되는 것인지도 몰라요. 불에 태워도 태워지지 않는 뭔가로. 그것은 너무 작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속에 들어가 살 수 있어요. 그것은 사람들의 눈을 통해 들어가 몸속에 저장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원히 사는 것이에요. 그들의 심장 속에서. 나는 나로 살 수 없어요. 저는 당신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해요. 당신으로 인해 누군가는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당신 안에 있는 보이지도 않는 그 무엇 때문에.
리엘 : 미호 저는 당신의 것이에요.
미호 : 저 역시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리엘. 당신이 내게 건네준 인사를 하고 싶어요. 마을 사람들에게 다가가 당신이 내게 준 인사를 주고 싶어요. 처음으로 내가 사람임을, 내가 인사를 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당신이 내게 알게 해준 것처럼 그들에게 다가가 그들 존재 안에 있는 그 무언가를 제가 발견해주고 싶습니다. 인사를 하고 싶어요. 가장 온전한 마음으로 나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심정으로 그들에게 인사하고 싶어요. 당신이 내게 왔을 때처럼 빛으로 내게 왔던 그때처럼.
미호는 마을 사람을 향해 다가간다.
미호 : 안녕하세요.
마을 사람들은 그가 살인마라는 것을 알고 칼로 그를 찔러버린다. 천천히 바닥에 쓰러져 죽어가는 미호. 그러나 미호는 밝게 웃고 있다. 미호의 곁에 앉아 우는 리엘.
엔딩 음악이 흘러나온다.
……뭔가 이상했다. 죽어가는 미호가 리엘을 보며 시를 읊은 후 마지막 키스를 나누는 것으로 끝나야 하는데 내가 쓴 원고와 달랐다. 율리아샘이 프로포즈로 듣고 싶다고 했던 네오의 노래가 원고에 빠져 있었다.
……유가! 유가가 한 짓이 분명했다.
나는 가슴을 쥐어뜯었다. 내 원고를 가져가 마지막 결말을 지워버린 후 주인공들에게 원고를 보낸 것이다. 유가를 믿지 말라고 했던 사마귀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이미 늦어버렸다. 이렇게 연극은 끝나버리고 말았다. 이제껏 노력한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바닥에 털석 주저앉았다. 축축한 뭔가가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동성이와 사마귀에게 미안했다. 나 같은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는 또한번 나란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를 확인한 것밖에 한 것이 없다.
“저, 저기 뭐냐 다음 대사가 없는 것 같으니까…… 이젠 진짜 내 차례인 것 같네요.”
말룡샘이 바닥에서 주섬주섬 일어선다.
“여러분 잠시만 이 순간만큼만 저를 위해 자리에 앉아 계셔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제가 지금 좀…… 고백을 해보려고 합니다.”
순식간에 술렁거리는 체육관. 드디어 올 게 왔다고 생각한 학생들이 카메라를 켜고 영상 촬영을 시작한다. 핀 조명이 율리아샘에게 내려온다. 뭐지, 이거? 라는 얼굴로 율리아샘이 어정쩡하게 서 있다. 말룡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제가 고백할 대상은 바로.”
숨도 쉬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나는 꼴깍 침을 삼킨다.
“수남씨.”
인파들이 일렁거린다. 누구는 울고 누구는 웃고 누구는 소리를 질러댄다. 핀 조명이 객석에 앉은 수남샘에게 내리꽂힌다. 말룡샘이 마이크를 잡고 수남샘 앞에 선다. 떨리는 말룡샘의 목소리.
“당신을 오래도록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가나슈를 만드는 당신. 오래도록 아끼지 않고 아이들에게 말없이 그것을 나눠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진 찍히는 것을 싫어하는 당신. 수리꽃나무에서 한사코 당신은 사진 찍기를 거절했었습니다. 당신은 아름다운 것도 다 소용이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당신은 당신보다 꽃나무가 더 드러나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기숙방에서 제일 일찍 나오는 당신. 새벽빛을 보고 출근하는 사람은 당신뿐이었습니다. 당신은 그 누구보다 새벽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곳에 있는 십여 년 동안 당신의 그 한결같은 모습에 저는 위로 받았습니다. 이제는 말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수남씨 당신과 평생토록 함께 하고 싶습니다. 지금 저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시겠습니까?”
수남샘은 아무 말이 없는데…… 말룡샘 뒤쪽에 율리아샘이 멀거니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대체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 거냐며 당황스러운 것도 같고 굴욕적인 것도 같은 율리아샘의 표정을 보고 있는 것이 힘들어진다. 수남샘보다는 율리아샘의 상태가 더 걱정이 되는데…… 체육관에 있는 모두가 율리아샘과 수남샘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여는 사람이 없다. ……천천히 율리아샘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말룡샘에게 다가가 마이크를 뺏어버리는 율리아샘. 율리아샘이 마이크에 입을 대고 뭐라고 속삭인다. 점점 율리아샘의 목소리가 커진다.
“겨어얼호오온해 겨얼호온해 결혼해 결혼해 결혼해.”
율리아샘을 따라서 체육관에 모인 모든 이들이 외친다. 한 마음 한 뜻으로. 결. 혼. 해. 결. 혼. 해. 결. 혼. 해. 결. 혼. 해. 결. 혼. 해. 결. 혼. 해. 결. 혼. 해…….
아무 말도 없는 수남샘. 나는 콧물과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을 소매로 박박 닦아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감았다. 제발 이 순간만큼은 수남샘의 눈에 말룡샘이 정국처럼 보이기를 간절히 빌어보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수남샘. 까아아아아아약! 체육관 천장을 찢을 듯한 비명소리. 흥분의 도가니가 된 체육관. 남아 있던 폭죽이 있나 보았다. 센스 넘치는 학생부의 지시로 폭죽이 머리 위로 터져 올랐다. 불꽃이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꽃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불꽃 구경에 정신을 놓아버리고 있을 때 사마귀가 내게 다가왔다.
“양마리.”
“어?”
“우리…… 이긴 거 맞지?”
“……응.”
“저기.”
“어?”
“저기 좀 봐.”
멀리 안선배가 내게로 걸어오고 있다. 꿈인 것처럼 주변이 아득해진다.
“공연 잘봤어.”
“흐흐 흐흐흐흐흐.”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미호처럼 나도 너한테 인사하고 싶었어.”
안선배가 웃었는데…… 이전과 똑같았다. 나를 보는 안선배의 눈빛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눈치만 보던 학생들이 스멀스멀 사마귀와 동성이에게 몰려들었다. 벌연남에 가입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되나, 사실 벌연남에 가고 싶었는데 눈치가 보여 갈 수 없었다, 선배가 다시 벌연남을 시작했으면 좋겠다, 요정남 구독자다, 먹는 모습은 정말 호감이다, 라이브를 자주 해주면 좋겠다…… 며 호들갑을 떠는 후배들. 후배들에게 둘러싸인 사마귀와 동성이의 비장한 얼굴을 보며 나는 좀 감격에 겨워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무대 뒤편에서 유가가 걸어나왔다.
“……괜찮아. 유가.”
놀란 듯 유가가 나를 바라본다.
“정말이야. 어차피 이겼잖아.”
“양마리……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뭐?”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나는 유가의 손을 잠깐 잡았다 놓았다. 차가운 유가의 손, 그래서 심장은 따뜻한 유가.
우리는 다같이 아이스크림을 먹기로 했다. 편의점으로 걸어가는데 누군가 뒤에서 우리를 불렀다. 사마귀, 동성, 유가, 나는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저기 있잖아. 나도 같…….”
우리를 보며 벚꽃처럼 웃고 있는…… 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