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역사의 쓸모]- 최태성
왜 역사를 다시 공부해야 할까? 현재를 바쁘게 살아가고, 미래를 준비하기도 바쁜 세상에 구태연해 보이는 과거의 역사가 내 삶에 도움이 될까. 역사책에 손이 갈 때 가끔 한 번씩 튀어나왔던 질문이다.
역사는 사람을 만나는 인문학이다. 그들을 통해 작지만 의미 있는 하루가 모여 세상을 이루고, 역사를 만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과거를 보는 힘이 현재를 살아가는 법을 자연스럽게 알게 해주고, 현재를 온전히 살아가는 법을 알아 차릴때 미래가 설계되는 것이다.
왜 역사인가? 삶의 품위를 지켜주는 통찰력과 일상에서 오래된 지혜를 발견하는 저자의 깨달음을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수많은 우연이 필연이 되는 과정은 놀랍다. 세계 1차 대전의 원인이 되었던 사라예보의 총성은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되지 않고 살 수 있는 기회가 4번이나 있었으나, 결국 암살되고 필연처럼 세계전쟁이 일어났다. 동, 서독의 통일 또한 여행 자유화의 시작 지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지금 바로’라는 말실수로 동서독을 가루는 장벽이 시민들에 의해 부서지고, 우연하게 통일이 되었다.
한국 전쟁 중 군수 물자를 버리고 20만 명의 피난민을 거제로 수송한 이야기는 인간이 만들어낸 최악의 상황에서도 피어날 수 있는 인류애를 보여 준다.
머리가 나빠 수만 번씩 책을 읽어낸 김득신의 삶은 인내를 가지고 노력하라는 조용한 조언을 들려준다. 사도 세자와 영조의 갈등은 잘 알려진 일화다. 할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이를 지지한 신하들을 지켜보는 정조가 선한 세상을 바라보도록 도운 어머니 혜경궁 홍 씨에 대한 이야기는 인상적이다. 세상을 선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아들을 이끈 어머니를 통해, 부모의 역할을 생각하게 한다. 경쟁에서 성장시키는 힘이 아니라, 가진 것으로 나누는 법을 알려 주는 게 아이를 위한 더 큰 행복과 성공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가르침이 된다.
승자의 품격을 알려 주는 백제 마지막 왕 의자왕과 신라 왕이 되는 김춘수 이야기는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패자에 대한 승자의 품격이 필요함을 보여 준다. 1864년부터 1910년 격동기의 정치, 경제, 심지어 저잣거리의 소문 까지를 담고 있는 황현의 <매천 야독>은 한 개인이 들려주는 실감 나는 현장이야기다. 한 사람이 써낸 책이 귀한 자료가 되어, 개인의 행동이 역사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평범하게 보내는 일상도 역사가 된다.
11살 고아 최재형을 러시아 부부가 데려다 길렀고, 최재영은 당시 최고의 부를 이룬 사람이 되었다. 조선에서 버림받은 아이지만, 독립운동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쏟았고, 가난한 조선인들을 보살펴 주어 그의 사진이 집집마다 걸려 있었다는 이야기는 새롭다. 추운 만주 벌판에 따뜻한 난로 역할을 해주었던 최재형의 별명, ‘패치카’는 그가 걸어온 길을 보여준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거시적 안목이 왜 중요한지를 알려 준다. 유럽 강대국들이 영광에 취해 시야가 좁아져 결국 성장을 멈춘 이야기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에게 교훈이 된다. 길게 보고 걸어가는 안목은 현재의 리듬을 빠른 걸음이 아니라 안정적인 걸음으로 차분하게 걷게 한다.
난공 블락의 콘스탄티노 폴리스 함락 이야기는 경이롭다. 배가 산으로 갈 수 있다는 역발상이 이끌어낸 기적이다.
초능력보다 중요한 것이 상상력이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들이 잘 보여준다. 시대를 이끄는 영웅에게 필요한 것이 상상력이다. 노비라는 신분에 갇히지 않고 자유인을 꿈꾼 만적, 양반 다움에서 벗어난 토정 이지함, 조선의 학자다움에서 벗어난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학교가 가지는 가치가 왜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닫는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령으로 한 동안 온 나라가 폭풍 속을 헤멜 때가 있었다. 한국 엘리트들이 개인 성공을 위해 부끄럼 없이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인생 철학의 부제가 보였다. 독립에 힘쓸 수 있는 인재 양성이 목표였던 ‘명동 학교’에서 안중근이나 윤동주 같은 인물들이 탄생했고, 영재를 육성하기 위해 국가가 세운 통역 학교인 ‘육영 공원’에서는 매국노 이완용을 만들어 냈다. 나라를 이끌 훌륭한 인재 양성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가진 능력으로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소명 의식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출세하겠다는 자신만의 성공을 위한 행위들은 타인의 삶까지 도구로 만들어 버린다.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은 어려운 길을 잘 헤쳐왔다. 역사의 한 페이지에 몰락의 이유가 아닌, 극복의 사건들로 기록될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참된 교육은 단순히 지식인을 키워내는데 그치지 않고 올바른 철학을 가진 지식인을 키워내는 데 힘쓰는 일일 것입니다.’
선조를 부끄러워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자랑스러운 조상의 정신을 이어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물질적 재산이 아니라, 떳떳하게 살아가는 정신을 물려줄 때 후손들의 삶은 기억하고 싶은 또 다른 역사가 된다.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을 온몸으로 돌보았던 미국인 서서평의 이야기는 삶의 목적이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 될 때 어떤 역사를 만들어 내는지 보여 준다. 이름까지 한국인으로 계명하고, 모든 식 습관과 생활까지 바꿔버린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유일하게 가진 재산이 몸을 덮는 담요 한 장이었다. 세상과 이별할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살아온 길이 역사로 남아 후손들에게 교훈이 되어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다.
역사를 공부를 통한 저자의 깨달음이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줄 것 같다.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는 크고 원대한 목표에 사로잡혀 소박한 오늘의 행복을 외면하지 말 것, 나의 삶은 나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 것, 그리고 하루를 정성스럽게 사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목소리처럼 들렸지요.’
역사를 대할 때 하나의 거대한 성을 보는 법도 있지만, 전체를 이루는 작은 조각들을 듬성듬성 만나는 법도 있다. 저자 덕분에 역사 공부의 이유가 더 명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