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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증편향과 독서의 힘

by 책봄

SNS나 유튜브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선호하는 콘텐츠를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가끔은 무서울 정도로 나의 관심사를 정확히 파악한다. 분명 편리한 측면이 있지만 사용자를 편향된 정보로 이끈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인간은 이미 자신이 믿고 있는 정보나 신념을 뒷받침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인간의 보편적 심리를 '확증편향'이라고 한다.


사랑에 빠졌을 때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그 사람의 장점만 보인다. 어쩌다 단점이 드러나도 쉽게 잊어버리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왜 그럴까? 내가 믿고 있는 사실과 다른 정보를 마주할 때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불쾌감을 해소하기 위해 뇌는 바빠진다. 그러나 원래 인간의 뇌는 인지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꼼꼼이 따지고 분석하는 대신 내가 믿는 정보와 일치하는 부분만 빠르게 수집하고는 심리적 안정을 회복한다. 경고였을지도 모르는 단점은 그렇게 묻혀버린다. 심리적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인지적 효율성을 발휘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이런 인간의 취약점을 이용해 알고리즘은 점점 더 좁은 울타리 안에서 생각하게 하고 그 속에서 편견은 더욱 공고해진다.


이는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자기계발서는 쓸모없다’고 믿는 사람은 어떤 훌륭한 사례나 본받을 만한 부분이 있어도 ‘이건 특별한 경우일 뿐 나에게는 적용될 수 없어’라며 무시한다. ‘절약이 부의 핵심이다’라고 믿는 사람은 경제서를 읽어도 투자에는 회의적이다. 내가 이미 알고 있거나 공감하는 부분만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읽기는 했지만 편견은 그대로 남아 있고, 내 삶을 변화시킬 수 없는 상태, 이것이 확증편향 독서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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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증편향은 무의식적인 행동이다. 아무리 다짐해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내가 믿고 있는 것에 맞는 정보만 수집하게 된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질문’이다.


질문은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생각에 제동을 건다. 이 방향이 정말 맞는지, 다른 길은 없는지를 묻는다.


“나는 왜 이 주장에 동의하는가?”

“이 책의 입장과 반대되는 사례는 없을까?”

“내가 이 문장을 불편하게 느낀 이유는 뭘까?”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할까?”


이런 질문은 확증편향의 반응을 멈추고, 사고의 틀을 깨준다. 본능을 거스르는 것은 불편한 일이지만 이런 경험이 반복될수록 사고가 확장되고 편견에 빠질 위험이 줄어든다.


그렇다면 어떨 때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까?


첫째, 진심으로 공감되는 문장을 만났을 때이다. 이럴 때 ‘나는 왜 이 말에 공감하는가?’를 생각해보고 ‘이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 근거는 무엇일까?’를 따져본다. 공감되는 문장에 반대 입장을 생각해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럴 때는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어 보는 것이 가장 좋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이럴 때, 챗GPT와의 대화를 통해서도 반대 입장을 생각해볼 수 있다. 실제 대화 예시를 살펴보자.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 그 후의 일상>을 읽고 챗GPT와 나눈 비판적 대화 예시]

Q. 나는 알랭드보통의 <낭만적 연애, 그 후의 일상>을 읽고 사랑은 열정이 아니라 기술이라는 말에 굉장히 공감했어. 결혼생활을 할수록 특히 사랑을 유지하는건 서로에 대한 배려과 양보, 공감 등이 반드시 필요하고 이는 기술처럼 배워야 하는 부분이라고 느꼈거든. 그런데 이런 내 생각과 반대되는 입장도 있을 것 같아.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입장에서 '사랑은 열정이 아니라 기술'이라는 말을 반박해줄래.

A. 사랑은 기술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열정이다. “사랑은 기술”이라는 말은 너무 계산적이고 기능적인 사고방식이다. 진짜 사랑은 학습이나 훈련으로 되는 게 아니라, 감정의 폭발과 본능적인 끌림에서 출발한다. 기술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감정이 식은 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일 뿐, 사랑의 본질을 설명할 수는 없다. 사랑은 처음부터 어떤 ‘의지’나 ‘배려’로 발생하지 않는다. 사랑은 뜨겁고, 충동적이며, 설명되지 않는 감정에서 시작되고, 그것이 없다면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관계는 공허하다. 게다가 기술로 관계를 ‘관리’하는 방식은 마치 사랑을 일처럼 만드는 것같고,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을 왜곡할 수 있다. 사랑은 효율이 아니라,*혼란, 갈등, 몰입, 광기 같은 예측 불가능한 감정의 소용돌이이며, 그게 바로 사랑을 사랑답게 만든다.

결혼생활도 마찬가지다. 기술로 유지하는 관계는 편안함은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심장의 떨림, 존재의 흔들림 같은 생생한 경험을 주지 못한다. 진짜 사랑은 언제나 열정이고, 그런 열정은 계산하거나 훈련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반대로 반발감이 드는 문장에 대해서도 질문할 수 있다. ‘나는 왜 이 주장이 불편하지?', ‘이 주장이 옳다는 근거는 무엇일까?’와 같이 책이 말하는 주장에 대해 비판적 질문을 할 수 있다. 또 같은 주제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 책을 함께 읽어볼 수도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이고 다음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의 글을 읽어보는 것이지만 불가능하다면 인공지능과 대화를 통해서도 가상의 상황을 경험해볼 수 있다.


[이은국 <행복의 기원>을 읽고 챗GPT와 나눈 대화 예시]

Q. 나는 이은국 교수의 <행복의 기원>이란 책을 읽고 행복은 진화의 산물이며 추구해야 하는 목표가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는 말에 굉장히 공감했는데 이와 반대되는 입장이 있을 것 같아. 반대입장에서 행복에 대해 반론해줄 수 있어?

A. 반대 입장: 행복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추구해야 할 목표다. 행복을 단지 진화의 부산물, 생존을 위한 신경학적 보상 체계로만 보는 것은 인간 존재를 너무 생물학적으로 환원하는 접근이다. 그렇게 보면 행복은 결국 호르몬 반응에 불과한 것이고, 이성적 추구나 삶의 의미와는 무관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인간은 단순히 쾌락을 느끼는 동물이 아니라, 삶의 방향성과 목적을 고민하는 존재다. 행복은 그런 존재가 의식적으로 추구하고 만들어가는 가치이며 삶의 궁극적 목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eudaimonia)을 자기실현을 통한 삶의 완성이라고 봤고, 현대 심리학자들도 자기 결정성, 성취, 관계의 질 등이 행복의 구성 요소라고 말한다. 즉, 행복은 단순히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계획하고 선택하고 도전하는 과정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만약 “행복은 추구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삶의 방향성을 잃고 현재에 안주하거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조차 포기할 수 있다. 그건 오히려 불행에 가까운 삶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책을 이런식으로 읽을 수는 없겠지만 유독 납득이 잘 되지 않는 책을 만났거나 반대로 깊이 공감되는 책을 읽었을 때 타인과의 대화 또는 인공지능과의 간접적 대화를 통해서 내가 가진 확증편향을 깰 수 있다.


질문은 나를 내 생각 밖으로 밀어내고 우리는 그곳에서 새로운 관점, 낯선 시야, 다른 결론과 마주하게 된다. 질문 없이 읽는 책은 내 생각을 확인해주는 도구가 되지만, 질문하며 읽으면 내 생각을 의심하는 도구가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독서는 단순한 정보 소비가 아닌 자기를 변화시키는 출발점이 된다. 질문은 불편함을 동반한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바로 편견을 무너뜨리는 첫 번째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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