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이의 생일을 맞아 놀이동산에 다녀왔다. 아이들에게는 꿈과 희망이 넘실대는 마법 같은 공간이지만, 어른이 된 나는 그곳에서 정반대의 감정을 맛보았다.
주말이라 놀이기구마다 30분 이상 대기는 기본이었다. 아직 어린아이들이기에 비교적 줄이 짧은 곳을 골라 기다리기 시작했다. 10분, 20분이 흐르자 다섯 살, 여섯 살 아이들은 몸을 배배 꼰다. “놀이동산은 원래 기다리는 곳이야”라고 어르고 달래며 차례를 기다린다. 드디어 우리 순서가 코앞이다.
그런데 마침 우리가 탈 차례에, 우리가 서 있던 곳과는 다른 줄에서 '패스트 트랙' 사용권을 가진 가족들이 등장했다. 하필 그 가족이 우리 앞에서 탑승하는 바람에, 우리 순서가 뚝 끊겨버렸다. 아이들은 울상이 되어 나를 바라본다.
엄마, 왜 우리보다 늦게 왔는데 먼저 타?
아이의 물음에, 나는 입만 달싹거릴 뿐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아이는 정말 궁금하다. 왜 우리가 먼저 왔는데, 늦게 온 사람이 먼저 타는 것인지. 고작 5살의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일 것이다. 놀이터에서는 분명 줄을 먼저 선 아이가 먼저 그네를 탔으니 말이다.
나는 아이에게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먼저 탈 수 있는 티켓이 있어서 그래." 아이의 마음속에 이 말이 어떻게 남았을까.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을까. 다행히도 곧 우리 차례가 되었고, 아이는 언제 울었냐는 듯 해맑게 놀이기구를 탔다.
어쩌면 아이는 잠시 속상하고 말았던 순간에, 나는 오래도록 생각이 깊어진다.
사회에는 다양한 패스트트랙들이 있다. 놀이동산뿐 아니라 비행기 탑승, 호텔 체크인 등. 다양한 곳에서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다. 그럼에도 유독 놀이동산의 패스트트랙에서 생각이 많아지는 이유는, 이곳은 모든 아이들이 꿈과 희망을 찾으러 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꿈과 희망의 공간에서 거친 자본주의적인 현실의 민낯을 마주해서일 것이다.
나는 자본주의의 효율성과 서비스에 감사한다. 돈으로 편리함을 살 수 있는 구조도 수용하고, 때로는 적극 활용한다. 그러나 고작 세상에 태어난 지 48개월 된 아이에게 돈이 있으면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설명하며, 나는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48개월 된 아이에게 놀이공원에서 가르치고 싶은 가치는, 놀이동산과 같은 공공장소에서는 줄을 잘 서야 한다는 것, 모두가 질서를 잘 지킬 때 모두가 즐겁게 놀이동산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어쩌면 뻔하지만 당연한 것들이었다.
주말에 놀이동산에 다녀온 부모라면 대부분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서 나도 아에에게 '패스트트랙'을 사줘야겠다." 물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공정하게 질서를 지켜서 속상한 아이가 아무도 없는 놀이동산"이 될 수는 없을지 생각해 본다. 아이들이 주 고객인 곳에서는 패스트트랙이 없다면 어떨까.
아이들이 줄을 서며 기다리는 시간도, 그 자체로 소중한 배움의 시간일 수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