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는 언제나 사랑을 조용히 파괴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빠져나오지 못했다.
센터 대기실에서 또래 아이가 유창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SNS에서 ‘우리 아이는 벌써 한글을 읽어요’와 같은 글을 보면 나는 ‘괜찮다’고 되뇌면서도 나도 모르게 마음 한켠이 씁쓸했다.
스텔라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겠다 다짐했지만,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평균’이라는 잣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잣대는 언제나 내 행복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나는 지극히 평균적인 사람이었다. 아니, 평균보다 조금 더 나은 편이었다. 성적도, 직장도, 삶의 궤도도 언제나 ‘평균 이상’이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평균 이상’이 사랑받는 기준이라고 믿었다. 평균에 닿지 않으면 불안했고, 남들보다 뒤처지면 두려웠다. 그 믿음은 자연스레 아이에게로 옮겨갔다. 스텔라도 나처럼 될 거라고, 평균을 웃도는 아이로 자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 믿음은 아이의 영유아 발달검진표 앞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배를 바닥에 대고 앞으로 간다 ---- 전혀 할 수 없다
장난감을 손에 쥐어주면 흔든다 ---- 전혀 할 수 없다
대부분의 항목에 체크된 ‘전혀 할 수 없다’라는 글자는 마치 내 가슴에 빨간 펜으로 그어진 낙제 표시 같았다. 영유아 검진은 내게 공포의 의식이었다. 검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면 어김없이 절망의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아이의 신체, 발달 상의 지표가 ‘평균’보다 한참 떨어지는 현실에 나는 매번 좌절했다. 아이가 평균에 한참 못 미치는 삶을 살게 될까 봐, 평균보다 낮은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웠다.
그 후로 몇 년 동안, 나는 그 평균선에 아이를 맞추기 위해 애썼다. 평균을 넘어야만 괜찮은 엄마가 될 것 같았고, 그래야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토드 로즈의 책 <평균의 종말>을 만났다.
“평균적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한 문장이 내 마음 깊은 곳에 박혔다.
그는 말했다. 평균이란 통계적 분석을 위해 만들어진 허상의 개념일 뿐, 그 평균값에 해당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고.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마치 오랜 시간 나를 옭아매던 사슬 하나가 풀리는 듯했다.
스텔라가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평균’이라는 개념 자체가 실재하지 않는 허상이었던 것이다.
얼마 후, 마음공부 스승님이 내게 물었다.
“만약 네가 스텔라와 무인도에 단둘이 산다면, 그래도 스텔라가 느린 게 문제가 될까?”
나는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요, 전혀요”
무인도에선 비교할 대상이 없으니 당연히 느린 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느리고 빠르다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순간, 모든 게 선명해졌다.
스텔라가 느림이 문제가 되는 건, 내가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기 때문이었다. 남들보다 느리고, 남들보다 못하니까 불안했던 것이다. 그 비교의 덫에 나를 가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니 아이에게 라벨을 붙였다.
너는 문제가 있어,
너는 치료받아야 해,
너는 부족한 사람이야,
너는 장애아야!
그 모든 불안과 공포의 근원은 ‘비교’라는 거짓 렌즈였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스텔라의 어제와 오늘만 바라보기로 결심한 건.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지 말고, 평균 발달 속도에도 비교하지 말고, 오로지 아이의 어제와 오늘만 보기로 했다. 어제보다 오늘, 티끌만큼이라도 나아졌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그것만으로도 감사해하고 칭찬해 주자고 다짐했다.
그 작은 결심이 내 마음의 폭풍을 서서히 잠재웠다. 비교의 파도는 여전히 밀려왔지만, 이제는 나를 삼키지 않았다.
아이는 여전히 평균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 평균 아래에서 비로소 평화를 배웠다.
스텔라는 여전히 느리다. 그러나 그 느림 안에는 고유한 리듬이 있다.
그 리듬이 세상의 평균보다 늦을지라도,
그건 결코 실패가 아니라 생명의 고유한 박동이다.
평균이라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허상.
스텔라는 그 허상의 선 밖에서, 자신만의 빛으로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