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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세상의 창조주다

by 슈퍼거북맘

한때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사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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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겐 파란 바탕에 검은 레이스(파검), 또 누군가에겐 흰 바탕에 금색 레이스(흰금)로 보이는 그 드레스.

같은 대상을 보고도 각자의 눈은 전혀 다른 색을 본다. 빛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뇌가 해석하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인식의 틀’을 통해 세상을 본다.


그렇다면 ‘진짜’ 드레스의 색은 무엇일까?

‘객관적 실재’란 과연 존재할까?


스텔라가 자폐 스펙트럼 진단을 받기 전, 나는 국내의 권위자들을 여럿 찾아갔다. 그런데 의사들마다 자폐를 보는 범위가 달랐다. 어떤 의사는 ‘자폐가 아니다’라고 했고, 또 다른 의사는 ‘맞다’고 했다. 똑같은 아이를 두고 내린 정반대의 진단이었다.


시간이 흘러, ADOS 검사도구를 이용해 ‘객관적’인 수치로 공식 진단을 받았지만, 그 점수 또한 누군가의 관찰과 판단이 매긴 것이다.


이때부터 나는 ‘객관’이라는 말에 대해 깊이 고찰하기 시작했다.



내가 바라보는 ‘나’와 타인이 바라보는 ‘나’는 같지 않다. 누군가는 나를 성실하다고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고지식하다고 말한다. 그들이 보는 것은 ‘나’ 그 자체가 아니라, 각자의 인식 필터를 통해 비친 ‘나의 이미지’ 일뿐이다.


결국 우리는 각자 자기 눈에 비친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객관적 실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공(空)’이라 부른다.


이 세상 사물이 모두 객관적인 실재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실체가 없어 그 내용은 텅 빈 것이며(空),
있다고 해도 잠정적으로 그럴 뿐이어서 가(假)라고 하며,
내용은 없지만 잠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중도라고 한다는 뜻이다.


공(空)의 개념은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와도 닮아있다. 우주 만물은 99.999% 텅 빈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그 안의 전자는 확률의 파동으로 존재한다. 결국 우리는 고정된 우주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의 파동 중에서 ‘내가 바라보는 상’으로 구성된 시뮬레이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우리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능력(선험적 구조)에 따라 사물을 인식한다고 했다. 니체 역시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해석뿐이다’라고 했다.


심리학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게슈탈트 심리학은 인간이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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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하나의 그림에서도 어떤 이는 아름다운 여인을, 다른 이는 마녀 같은 노파를 본다. 내가 어디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같은 선과 면이 전혀 다른 형상을 만들어낸다.


똑같은 상황, 똑같은 세상을 보고도 어떤 이는 긍정적인 면을, 또 어떤 이는 부정적인 면을 본다. 그 차이는 각자가 지닌 마음의 상, 인식의 틀 때문이다.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지만, 불교와 칸트, 니체는 결국 같은 진리를 가리킨다.

세상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래서 같은 현실이라도 해석하는 시선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똑같이 아이가 발달장애 진단을 받았을 때, 누군가는 절망에 빠져 세상을 원망하고 하루하루를 한탄 속에 보낸다. 반면, 누군가는 그 경험 속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그 길 위에서 자아실현의 삶을 살아간다.


어떤 관점을 택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다. 그 선택이 곧 나의 세계를 만든다.

각자가 쥔 필터에 따라, 우리는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간다.


스텔라의 진단 이후, 나는 오랜 시간 우울과 절망의 필터로 세상을 보았다.

하지만 결국 깨달았다. 세상을 바꾸려면, 먼저 나의 필터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내가 생각과 관점을 바꾸자, 눈앞의 현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절망은 희망으로, 한탄은 감사로.


그때 나는 분명히 알았다.

나는 내가 살아가는 세상의 유일한 창조주라는 것.


이제 나는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필터를 걷어내자, 빛은 이미 내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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