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고 매끄러운 것에 대하여
캐서린 번하드의 작품을 보자마자 떠오르는 생각은 “아, 이 상품 잘 팔리겠다.”였다. 전시장에 와서 그림을 보고 작품이 아닌 상품이라고 하다니. 내게는 복잡한 심경으로 다가왔지만, 미술 시장을 생각하면 가능한 말이었다. 캐서린 번하드의 작품은 모든 작품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져 어느 작품에는 물감이 흐르는 모습과 물감의 번짐이 그대로 드러나 이것이 수작업임이 보이는가 하면, 몇몇 작품에서는 파스텔톤의 색과 회색의 조합, 일부 스프레이로 뿌린 이미지에서는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이미지들이 언뜻 떠오른다. 작품 안에는 상업 캐릭터, 메이커, 모델, 또는 기하학적 패턴이 그려져 있는데, 그중 메이커와 기하학적 패턴으로 그린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추상공간으로 보이는 이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관객이 그 안으로 들어가 공간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 상상의 과정에서 작가가 자신의 작업 세계에 관객이 들어가는 것을 기꺼이 환영해 주는 느낌을 받았다. 작품들의 첫인상은 한없이 가볍고 매끄러웠다. 여기서 매끄럽다는 말은 표면이 맨질맨질하다는 의미보다는 가벼움으로부터 오는 매끄러움을 뜻한다. 이것은 어디에나 어울리고, 이것을 접할 때는 일상생활 어디서든 접해도 관객의 기분이 깊게 빠지게 하거나 감정을 해치지 않는다. 여운 또한 일상생활을 해치지 않을 정도의 가볍고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한다. 오늘날의 인기 순위들의 노래들도, 수많은 상품도 상업성을 띤 것들은 이러한 매끄러움이 공통되게 느껴진다.
캐서린 번하드의 작품은 작가의 작업 세계와 섞여 강력한 상품이 된다. 한가람 미술관은 이것을 놓치지 않고 전시장 일부를 팝업 스토어처럼 꾸며 놓았고, 그곳은 커플들의 포토존이 되었다. 포토존에 찍힌 사진은 sns로 옮겨간다. sns의 창은 또 다른 세계가 되었다. 실제로 나와 먼 거리의 일상조차 우리의 휴대폰 창에서 손가락 하나로 끌어올 수 있다. 손가락으로 활보하는 우리의 지면은 좁아졌지만, 손가락이 닿고 있는 화면 안에는 끝없이 펼쳐진 공간과 시간을 갖고 있다. 앉아서도 다른 나라의 이미지들을 쉽게 얻고 볼 수 있는 것과 동시에 실제로 보면 느낄 수 있는 많은 감각과 경험이 생략됐다. 실제 작품이 휴대폰 세상으로 들어감으로써 작품의 아우라가 제거되고, 작품과 관객이 만들어내는 에너지, 누군지 모르는 타인과 함께 경험하는 펼쳐진 여러 가지의 가능성이 사라진다. 작품의 아우라와 현장감이 죽어간다. 작품이 있는 전시장에 가도 우리는 전처럼 작품과 관객이 만나 에너지를 만들지 않는다. 전시장에 온 우리들의 발걸음은 가볍다. sns에 올릴 사진들을 찍는 데 몰두하고 있다. 찰칵의 빠른 소리에 맞춰 고개를 돌린다. 우리는 작품을 그냥 지나친다. 우린 전시장에 왔어도 작품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것보다 카메라 화면을 통해 보는 시간이 더 길거나 비슷하다. 작품의 아우라는 작품 크기, 색깔과 사용된 재료의 재질, 붓 터치 등으로 작품의 존재감 그 자체이자 작품이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을 뜻한다. 하지만 작품이 sns 속으로 들어가면서, 많은 것들이 생략된다. 단순해지고 일정해진다. 우리는 아우라가 제거된 반쪽짜리 작품을 보면서 그 작품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관객이 실제 작품이 있는 전시장으로 향했어도 우리는 더 이상 작품을 감각하지 않는다. 그저 죽은 관객의 발걸음뿐이다. 이러한 생각의 방식은 작품을 이미지 소비 속으로 뛰어들 게 만든다. 작품은 아우라를 잃고 sns 속 수없이 쏟아지는 이미지 중 하나가 되어 이미지 과잉 생산에 무참히 들어가 버린다. 몇몇 실제 작품들은 아우라가 사라지면서 상품으로써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과잉 생산 속 태어난 상품으로써의 작품은 우리의 감정을 깊게 빠지게도, 해치지도 않는다. 그저 가볍게 무해한 이미지로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