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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용구 Nov 21. 2024

초승

저 높이 두고 온 노란 닻이 보이네

초승

                                        인용구

나 태어나 항해를 시작할 적에

닻이나 돛 하나를 택하라 하셨네

어디로든 훌떠나고 싶어

돛을 챙겨 홀로 나 바다로 나갔네


수많은 하루를 보낸 뒤에야

바다는 생보다 넓다는 걸 알았네

오늘에 머무르고 싶어도

닻이 없어 하릴없이 흘러야 했네


나 다치기 싫어 도망치기를 택했으나

그대 손짓에 푸른 바다 고요히 닫히네

파도처럼 닥친 그대 닮은 서글픔에

내 작은 조각배 위로 어둠이 덮치네


검게 젖은 가슴에 시가 돋히면

가라앉으며 그제야 아득히 보이네

저 높이 두고 온 노란 닻이 보이네

깊은 바다에 눈물 몇 방울 보태네



    2017년 제작된 KAIST 영화제작동아리 은막의 여름영화 <알고 싶어요>는 타인의 눈을 마주 보면 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텔레파시 telepathy" 능력을 가진 기자 선정과 신체접촉을 통해 대상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엠파시 empathy" 능력을 가진 작가 지호의 이야기를 다룬 일상 판타지-로맨스 영화다. 남들의 거짓말을 너무 쉽게 눈치채서 사람을 믿지 않는 선정과, 격한 감정 변화를 자주 겪으며 점차 사람을 멀리하게 된 지호가 서로를 통해 처음으로 진심을 공유하며 위로를 얻는 이야기. 진부하고 오글거리지만 그래도, 좋잖아요. 약간 외로운 두 사람이 서로에게 구원이 되어주는 서사 이런 거 맛있지 않습니까? 특히 그 절정 즈음에 선정이 거울 속 자신의 눈을 마주 보며 생각에 잠기는 장면은 크으... 맞죠, 우리는 가끔 남의 생각은 귀신 같이 알아도 자기 기분이나 생각은 잘 알지 못할 때도 많잖아요.


    이쯤 되면 눈치챘겠지만 그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으로 연출을 한 게 바로 나다. 다시 읽어봐도 많이 부족한 시나리오지만, 이야기에 대한 애정은 작지 않았다. 그러나 열악한 제작 환경과 동아리 활동이라는 한계 때문일까, 영화는 아쉽게 뽑혔다. 모든 배우가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든 서브플롯은 전혀 극 진행과 무관한 사건으로 이루어졌고,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촬영이라던가 연기라던가 아마추어의 부족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작품이 나와버렸다. 편집에 참여한 후배 하나가 영화 제목을 <모르고 싶어요>라고 부르고 다녔으니, 말 다했다. (흑) 그래도 동아리 활동으로선, 그러니까 열댓 명의 부원들과 3주 내내 동고동락하며 무엇이라도 만들었다는 경험만큼은 적어도 내게는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나만 즐거웠던 거 아니지..?)


    한 가지 그래도 가장 아쉬움이 남는 것을 꼽으라면, 영화의 남자 주인공 지호의 직업을 '작가'로 설정했다는 부분에 있다. 그 직전에 찍었던 겨울영화 주인공은 프로그래머였으니, 그냥 내게 익숙하고 잘 이입할 수 있는 대상을 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나 싶기도 하고. 그러나 내게 낯선 삶을 그려보는 일은 훨씬 즐겁고 유익한 도전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이 있다.


    위의 시는 영화 주인공 "지호"가 작가라는 설정은 갖고 한 번도 글 쓰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어색할 것 같아서 영화에 삽입한 시다. 작은 촬영팀을 꾸려 미리 생각해 둔 로케이션을 돌아다니며 일종의 PV (poem video)를 찍어 보았는데, 당시에는 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디지털 풍화가 일어난 건지 원래부터 그렇게 개떡같이 찍었던 건지 굉장히 B급의 무언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문학의 뜨락 하면서 은막도 하는 후배 하나가 들어왔는데, 본인이 시를 소재로 영상 찍은 게 있다며 보여준다길래 나도 생각나 꺼내봤다가 슬퍼진 하루였다.


    그래도 시는 조금 재밌다고 생각한다. 닻과 돛이라는 비슷한 발음의, 정반대의 성질의 소재를 찾은 것이 첫째로 기뻤고, (너는 닻처럼 down 나는 돛처럼 up - 스윙스) 특히 3연에서 닻의 발음과 유사한 "다치기 / 닫히네 / 닥친 / 덮치네" 콤보가 라임도 살고 중의적으로 의미도 사는 것 같아서 좀 좋다. 4연에서도 "돋히면"으로 돛과 한 번 킥을 줘봤다. 근데 너무 어미가 "~~네" 로 끝나서 조금 낯간지러운 면은 있네.




    이번주 문뜨 정모에서는 시를 정말 모던하고 세련되게 쓰는 친구에게 한 번 막무가내로 시비를 걸어봤는데, (독특한 시어와 전개를 추구하는 건 알겠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의미 전달, 의도 전달, 정서 전달에 실패한 것 같아요. 이미지가 너무 많고 난잡하고 개인적이고 독자를 배려하지 않아요. 등등) 막상 할 말을 다 해놓고 보니 글 자주 들고 오지도 않고 가져와봤자 매번 광대짓만 하는 주제에 내가 무슨 자격으로 평가를 하나 싶은 거라. 그래서 "초승"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급히 써서 먹잇감으로 던져봤는데, 이 친구도 쌓인 게 많았는지 독설을 돌려주더라. (저희 친해요)


그냥 용구가 용구 했다 정도,,, 어떤 템플릿이 있고 소재가 달라지는 거지 좀 한결같다,, 한결같이 별로다 질린다,,, 솔직히 제가 형을 좋아하고 동아리 정모니까 읽는 거지, 이름표 떼고 밖에서, 그러니까 인터넷에서 이 글을 접했다면 좋게 읽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 아이 매워. 한결같이 별로다 뭐 이런 말은 제 머릿속에만 들린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서로 리스펙 하는 말도 많이 했습니다. 저 진짜로 sj 너무 좋아하구. 그런데 일단 확실히 뼈아픈 부분은 이 친구 말이 팩트여서 폭력이란 점이다. 확실히, 내 글은 좀 어느 형태로 고여버렸다. 물론 나는 그 지점이 좋긴 함. 재미있는 말장난을 발견하고 거기서 서글픈 구석을 발견할 때 그것이 시를 쓰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어지는 인간이라,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솔직히 내가 쓰는 글이 객관적으로 경쟁력이 없다고도 생각하지 않아. 물론 질릴 수는 있지만, 내가 쓰는 스타일의 글이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은 아니거든요오... 그러나 끊임없이 스타일의 변화를 시도하고, 현대시를 많이 읽고 흉내내기도 하며 조금 더 모던한 글을 쓰고자 하는, 그리고 실제로 계속 발전하는 그 친구에 비하면 아주 구태한 인간임도 사실이다.


    그래서 좀 더 다양한 스타일을 시도해보고 싶습니다. 확실히 행갈이라던가 전달하는 정서라던가, 그런 것도 너무 천편일률적이라는 지적에 통감합니다. 이것을 탈피하려는 노력이 스스로의 발전에도 의의가 있지만, 그 친구에 대한 리스펙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라고도 생각해서. 짓궂게 말했는데도 내 진심을 의심하지 않고 좋게 받아주는 너무 고마운 친구. (나 싫어하는 거 아니지..?) 글의 지향점이 많이 다른 것 같다가도, 또 다른 글을 읽을 때의 눈은 비슷한 것 같아서 제법 많은 것을 공유하고 교류할 수 있는 멋진 녀석이다. 정말이지 동아리 하면서 좋은 자극을 많이 받는다. 이번 겨울에는 글 진짜로 많이 써야지.


    화요일에 들고 갔다가 욕받이한 글도 아래에 첨부합니다.

초생달이라 했다
이 생 저 생이 이승 저승 된 것처럼
처음 사는 달이라고 그런 이름이 붙었다

100세 인생, 월령을 따르면 상현 무렵
하지만 사는 건 아직도 초승 같아
여전히 나는 요凹 모양이다
삐죽거림을 감추지 못하고
그늘진 면도 자랑인 양 내보이지

나이가 들수록 드러나는 밑바닥
내 황량한 바다까지 사랑할 수 있나
살아온 만큼 더 살고 난 뒤엔
망했다, 말고 보름찼다고
환하게 선명하게 말할 수 있나

그러자 달이 웃는다
어제보다 더 크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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