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휴대전화와 얻어낸 풍경들
2015년 2월, 둘째의 대학 입학을 앞두고 온 가족이 함께 떠난 하노이 여행은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축복 같은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대학생이던 큰딸은 스스로 가이드를 자청했다. 외할머니까지 함께하니 세대가 다른 다섯 사람이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특별한 여정이 되었다. 오래전부터 지도 앱과 해외 결제를 익숙하게 다루던 딸을 보며, '아이가 어느새 우리를 이끄는 나이가 되었구나'하는 대견함을 느꼈다.
공항 문을 나서는 순간 습기 섞인 따뜻한 공기가 얼굴을 감싸며, 마치 다른 계절이 나를 맞이하는 듯했다. 그렇게 2015년의 나에게 하노이는 계절을 통째로 바꿔 주는 곳으로 시작되었다.
하노이의 첫인상은 낯섦보다도 '움직임'이었다. 오토바이는 거대한 물결처럼 도로를 스쳐 지나갔고, 카페 앞의 플라스틱 의자에는 하루를 쉬어가는 사람들이 앉아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그때의 하노이는 지금보다 더 투박하고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그 소란 속에는 묘한 조화가 있었다. 각기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듯 보였지만, 서로를 향한 배려가 보이지 않는 규칙처럼 깔려 있었다. 신호등보다 서로의 눈치를 더 믿는 듯한 도시에 처음 발을 디딘 초보 여행자였던 나는, 언제 길을 건너야 할지 몰라 우물거렸다. 그럴 때마다 현지인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냥 걸어요"라는 듯 손짓을 보냈다. 불안과 신기함이 뒤섞인 감정이 가슴에 작은 돌처럼 얹혔다.
올드쿼터로 들어서자 시간은 한층 더 느릿하게 흘렀다. 낡은 간판과 좁은 골목, 늘어선 가게들, 그리고 오전 햇살을 머금은 플라스틱 의자들. 2015년의 하노이는 개발의 속도가 시작되기 전 투박한 매력이 그대로 살아 있는 도시였다. 작은 카페 앞에서 하노이식 아이스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은 바쁜 기색 없이 여유롭게 앉아 있었고, 노점에서는 즉석에서 라임을 짜 주며 "한 번 맛보라"며 웃어주었다. 그 따뜻함이 도시 전체에 번져 있는 듯했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삶의 리듬'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하루, 목적 없이 걸어도 괜찮은 시간. 초보 여행자였던 나는 그저 딸이 이끄는 길을 천천히 걸으며 이 도시의 숨결을 따랐다.
가족 모두가 가장 기대했던 건 하노이의 밤이었다. 호안끼엠 호수 주변의 불빛들이 물결 위에 일렁이고, 밤바람이 살짝만 스쳐도 길거리 음식 냄새가 골목을 타고 퍼져왔다. 시장은 사람들의 체온으로 더욱 따뜻해졌다. 그러나 그 따스한 장면은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곧 중단되었다.
야시장 노점상의 많은 인파들 속에서 예쁜 기념품들을 구경하던 중 큰 딸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외쳤다.
"엄마, 내 휴대폰이 없어졌어."
주머니가 비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손에 쥐어져 있던 휴대폰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빽빽이 붙은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 순식간에 가져간 것이다. 멀리서 울리는 호객 소리와 음악이 뒤섞여 있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모든 소리가 멎은 듯했다. 나와 남편은 놀란 딸을 안정시켰고, 외할머니는 연신 "괜찮다, 괜찮다"며 손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경찰을 찾기엔 이미 늦은 밤이었고, 시장 상인들은 우리만 쳐다보는 듯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조금씩 주변을 둘러보니 야시장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관광지와 빈부 차이가 겹쳐진 공간에서 생기는 작은 생존 방식,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하루를 버텨야만 하는 도시의 리듬이 어렴풋이 보였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딸은 허전한 마음 뒤로 애써 웃어 주었다. 그 모습에서, 나는 우리가 지나온 하노이의 모습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소매치기를 당한 순간엔 불편하고 두려웠지만, 돌이켜보면 그 사건을 통해 이 도시에 조금 더 가까이 들어간 기분이었다. '관광객의 하노이'와 '사람들의 하노이'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 그 속의 생동감, 그리고 그들이 살아온 역사까지.
베트남은 한 세기 가까운 프랑스 식민통치를 겪었고, 전쟁으로 수십 년을 소진한 나라다. 전쟁의 흔적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도시에서 사람들은 낮과 밤을 부지런하게 살아낸다. 거리의 작은 상점, 호안끼엠 호수 근처에 붙은 오래된 건물들, 전쟁 기념품을 팔던 할아버지의 주름진 손... 그 모든 것들이 베트남의 지난 시간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었다. 우리가 겪은 작은 사건마저도 그 역사 속에서 아주 작은 단편처럼 자리 잡은 것 같았다.
그다음 날부터 우리의 걸음도 조금 달라졌다. 길을 건널 때 오토바이 흐름을 더 집중해 바라보았고, 골목에서는 발걸음을 조금 늦추었다. 큰딸은 책임감 있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섰다. 외할머니는 "그래도 다치지 않은 게 다행이다"며 우리 마음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우리 가족의 발걸음은 어제보다 한결 가벼워졌고, 하노이의 소음도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돌아보면, 그 여행은 잃어버린 것보다 얻어낸 풍경이 훨씬 많았다. 사람 냄새가 진한 도시의 거칠고 따뜻한 숨결, 세대가 다른 가족이 함께 만든 추억, 그리고 작은 사건 하나가 선물한 깨달음까지. 그리고 나는 그때 깨달았다. 여행의 진짜 가치는 완벽함이 아니라, 예기치 않은 순간에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하노이는 복잡하고 빠른 도시였지만, 그 속도에 귀를 기울이고 나니 그 도시가 우리에게 남긴 온도는 오히려 더 깊었다. 초보 여행자였던 나는 그 리듬 속에서 처음으로 천천히 살아도 괜찮다는 감각을 배웠다. 2015년 2월 하노이가 알려준 이 느린 숨결만큼은 오래 간직하고 싶다. 그래서인지 2015년의 하노이는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여전히 따뜻하게 남아있다. 그해 겨울 끝자락에 만난 하노이는 내 안의 속도를 잠시 멈추게 한 고마운 곳이다. 도시가 아니라, 마치 그 시절 우리 자신의 모습처럼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