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나를 만나다.
김창열 화백의 아들, 김오안 감독이 연출한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에서 가장 좋았던 대사가 있다.
"아버지가 내게 전달하는 것 중에 꼭 하나만 간직한다면, 그건 지혜도 아니고 끈기도 아니며 자유나 솔직함도 아니다. 그건 아마 침묵일 것이다. 침묵은 말하지 않는 모든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이 문장을 들은 순간, 나는 오래도록 마음 깊은 곳에 눌러두었던 '침묵'이라는 단어를 새롭게 바라보게 됐다. 지금까지 침묵은 나에게 어둠과 불안의 다른 이름이었다. 대화 중에 갑자기 고요가 찾아오면 금방 어색함이 밀려와, 괜히 의미 없는 말을 얹고 억지 미소로 빈틈을 가리곤 했다. 침묵은 사람 사이가 멀어지는 예고처럼 느껴졌고, 나 자신과 단둘이 남겨지는 시간 역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감독의 내레이션은 그 오랜 선입견을 단숨에 뒤흔들었다. 침묵이야말로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드러내는 힘을 가진다는 사실을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아야만 비로소 떠오르는 시선과 동작들, 숨결과 빛, 작은 기척과 자연의 소리들. 침묵은 텅 빈 공간이 아니라, 이미 가득 차 있는 풍경이었다. 우리가 듣지 못했던 것, 보지 못했던 것, 놓쳐버렸던 것들이 조용한 틈 속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생각해 보니, 내가 가장 나답게 존재했던 시간들은 언제나 침묵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글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는 그 고요, 아무것도 적지 않는 백지 위에서 마음의 결을 더듬는 조용한 순간들. 그 침묵이 쌓여 문장이 되고, 문장들이 모여 결국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활자 사이에는 수많은 침묵이 숨어 있다. 작가가 말하지 않는 여백 속에서 나만의 해석이 태어나고, 독자는 자신만의 속도로 세계를 확장해 간다. 독서란 본질적으로 침묵과 함께 걷는 여행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영화를 볼 때도, 운동을 할 때도, 혼자 길을 걸을 때도 생각해 보면 모든 몰입과 집중은 침묵을 통과해 온다. 산책길에서 들리는 마른 낙엽 밟는 소리, 먼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냄새, 계절이 변화하는 기척, 이 모든 것들은 소음 속에서는 결코 들리지 않는다. 세상과의 연결을 잠시 끄고 고요 속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나의 감각은 다시 살아난다.
그동안 내가 침묵을 불편해했던 이유는, 아마도 외부의 침묵이 아니라 내 마음속 침묵을 견디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나 자신과 마주하는 일이 여전히 서툴렀고, 그래서 침묵이 찾아오면 순간적으로 방어적인 말을 쏟아냈던 것 같다. 하지만 영화 속 대사는 그 불안을 아주 부드럽게 감싸 주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 우리는 결국 침묵에 기대어 짐을 내리고 휴식을 취한다."
이 말은 내게 참 따뜻했다. 침묵이 외로움이 아니라, 오히려 마지막에 남아 우리를 품어주는 쉼터일 수 있다는 진실을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삶의 끝자락에서도, 대화 속에서도, 빛의 끝에서도 결국 우리를 감싸는 것은 침묵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일상은 늘 수많은 소음으로 채워진다. 사람들과의 관계, 해야 할 일들, 알림과 뉴스, 걱정과 기대들.... 그 안에서 우리는 종종 스스로의 목소리를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 그러나 침묵은 그 모든 소음을 잠시 멈추고, 다시 '나의 속도'로 돌아올 수 있게 해 준다. 스스로에게 묻고, 내면의 진짜 목소리를 듣는 시간은 결국 고요 속에서만 마련된다.
그래서 이제 나는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침묵이 찾아오면 불편해하기보다 오히려 그 자리를 천천히 들여다보려 한다. 나를 지키고 발견하게 해주는 문이 그 너머에서 열릴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든다. 말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침묵을 알게 된 것은 아마 올해 내가 얻은 가장 큰 의미 있는 선물일 것이다. 앞으로의 길 위에서도, 나는 침묵과 함께 걷고 싶다. 고요 속에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더 깊은 나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언젠가 어떤 끝에 다다랐을 때, 빛의 끝이든, 여행의 끝이든, 혹은 한 편의 글이 끝나는 자리에서도~
나는 조용히 짐을 내려놓고 침묵에 몸을 기대어보고 싶다. 그 침묵이 다시 나를 시작하게 시작하게 해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