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에 완전히 머무는 연습
가을이 짙어진 아침, 공기는 차갑지만 아침 햇살이 두꺼운 암막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순간, 나는 잠시 멈춰 서서 빛이 내 손등에 닿는 걸 바라본다. 그저 잠깐의 일상, 그러나 그 짧은 찰나에 "지금, 여기"가 있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에도, 찬물에 사과를 씻는 그 단순한 동작 속에서도, 나는 내 삶의 현재형을 마주한다. 보약 같은 가을 햇살에 제라늄 화분의 빨간 꽃들은 여기 지금의 풍경을 즐기라는 말을 건넨다.
예전의 나는 늘 '다음'을 준비하며 살았다. 다음 글, 다음 만남, 다음 계절. 그렇게 '다음'을 향해 달려가다 보면 지금의 풍경이 흔적도 없이 지나간다. 그제야 깨닫는다. 내가 진짜로 잃은 건 시간이 아니라 지금의 나 자신이었다는 걸. 그런 걸 자주 깨닫는다.
요즘 나는 의식적으로 속도를 늦추려 한다. 글을 쓸 때도, 필라테스를 할 때도, 남편과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나눌 때도, '지금'이라는 단어를 마음에 걸어둔다. 글이 막힐 때는 억지로 쓰지 않는다. 대신 베란다 화분을 돌보기도 하고 산책을 하며 계절을 느낀다. 그렇게 걷다 보면, 문장보다 마음이 정돈 된다.
남편이 아킬레스건 수술을 받은 지 오일째 되는 날이다. 통증이 덜해진 얼굴을 보며 나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쉰다. 이틀에 한 번 남편이 입원한 병원을 간다. 병원은 코로나 이후 면회시간이 정해져 있다. 딸과 나는 번갈아 남편의 상태도 보고 잠깐이나마 대화도 나누고 온다. 병원이라는 공간은 '기다림'으로 가득 차 있다. 회복을 기다리고, 진단을 기다리고, 퇴원을 기다린다. 그러나 그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나는 오히려 '지금 여기에 머문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운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현재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현재를 살지 못한다."
나는 그 문장을 병실의 고요함 속에서 다시 떠올렸다. 남편과 면회실에서 밀린 대화를 나누던 중 문득 눈에 들어온 장면이 있었다. 할머니 한 분이 천천히 휠체어를 밀고 있었다. 앉아 있는 할아버지는 하얀 머리가 성성했고, 두 사람은 아주 조용히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은 햇살이 좋네."
"응, 밝아서 좋아. 완연한 가을이야."
그 대화가 너무 다정해서, 남편에게 눈을 찡긋해 휠체어를 밀고 있는 할머니를 가리켰다. 남편은 입원하신 지 꽤 오래된 분이라고했다. 병원 복도라는 건 차갑고 무미한 공간인데, 그들의 느린 걸음에는 따뜻한 시간이 흘러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는 삶'은 이런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함께 있는 이 순간을, 그저 소중히 감싸 안는 일.
예전의 나는 늘 '다음'을 준비하며 살았다. 다음 약속, 다음 계절. 하지만 병원 복도에서 본 그 노부부는 내게 다른 삶의 속도를 보여주었다. 그들에게는 어제의 시간도, 내일의 걱정도 없었다. 오직 지금, 서로의 목소리와 체온이 있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J.D. 샐린저는 말했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사람은, 이미 인생의 반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 문장이 내 안에서 오래 맴돈다. 내 하루는 여전히 작고 평범하다. 남편이 재활을 위해 천천히 걷기 시작할 때, 나는 그 옆에서 발을 맞춘다. 우리는 걸음은 느리지만, 그 느림 속에서 '살아 있음'이 가장 선명하게 느껴진다. 나는 더 이상 '해야 할 일'중심으로 하루를 채우지 않는다. 대신 '살아 있는 느낌'을 중심에 둔다. 햇살이 흩어지는 병실 창문, 남편의 회복된 미소, 그리고 복도 끝을 걸어가던 노부부의 뒷모습. 그 모든 장면이 내게 이렇게 속삭인다.
"행복은 목표가 아니라, 지금 내가 걷는 이 순간의 발자국에 있다."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중.
오늘도 나는 내게 다짐한다.
"지금, 여기서, 충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