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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시가 오기 전에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를 읽고

by Chloe J

누군가에게 새벽 세 시는 수면으로 일상을 회복하는 시간이다. 또 누군가에게는 쉬는 사람들을 위해 직장에서 일해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젊음의 새벽 세 시는 취기와 함께 이제 막 짊어진 인생의 고민을 나누는 시간이고, 아픈 사람들에게는 견딤의 시간이기도 하다.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라는 책은 견딤의 시간을 맞닥뜨린, 혹은 함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늘 주변에 있지만 금기시되듯 잘 이야기되지 않는 질병·돌봄·노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책 서문 한 구절에서 멈칫했었다.

“이 책이 공구상자였으면 한다.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아프고 늙을 수 있는 사회, 정의로우며 심지어 기쁜 돌봄이 있는 사회라는 이상을 현실로 당겨오는 데 쓰일 도구를 담고 있었으면 한다.”
덮어두고 미루며 보지 않던 사실을 직면할 생각에 겁이 났다.


당연한 사실 하나가 있다. 인간은 모두 태어나 누군가의 돌봄으로 삶을 부여받고, 또 누군가의 돌봄을 필요로 하다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이다. 태어나 받는 돌봄은 보통의 가족관계 안에서라면 별문제 없이 어느 정도 기꺼이, 그리고 당연히 받을 수 있는 사랑이었다면, 질병이나 노화로 돌봄이 필요한 상황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불편한 상황들은 흔하게 벌어진다. 이따금 이것저것 자극적인 뉴스에 섞여 나오는 ‘간병 동반자살’ 기사는 이제 클릭할 만큼의 새로움조차 되지 못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경험치나 상황만큼의 이해도를 갖게 마련이다. 돌봄, 질병이라는 이 책의 주제 속에서 젊은 환자의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책 속에서 그들의 고통을 대면하기 전까지, 어쩌면 나도 과거 피해자였으면서도 무심했다.


나는 10년 전 암 수술을 받았다. 간병인이 없는 병동에서 남편도, 아이도 보지 못하고 홀로 자고 일어나 수술을 받았었다. 여건이 그랬다. 양가 부모님 모두 생계를 놓고 올 수 없었고, 딸아이를 돌봐주어야 했다. 남편은 다 함께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했다. 그래도 내 투병 생활은 빨리 끝났고, 완치되어 이 자리에 있다. 그 시기에 잠시 일상의 상실을 느꼈다. 나는 남편과 동기였다. 졸업 후 근처에서 일하는 동기들의 소식을 알음알음 들을 때면 소외감이 좌절감으로, 열등감으로 바뀌곤 했다. 집에서 요양하고 있는 나는 가족들의 짐이고, 인생의 낙오자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운이 좋았기에 계속 이어지는 돌봄 없이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고, ‘덤으로 얻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이토록 운이 좋아서 그 모든 과정을 잊었다. 그리고 그만큼의 인식 기준으로, 사회에서 건강한 사람들과 함께 배제의 시선으로 아픈 사람들을 ‘평가 아닌 평가’로 바라보았을지도 모르겠다.


건강한 사람은 몸을 잊고, 아픈 사람은 몸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몸은 잊을 수 없게 되었다가도 회복되고 나면 마치 몸이 없는 듯 살아가게 된다. 병든 몸에 처해 있을 때는 나와 상관없이 나를 배제하고 돌아가는 사회가 원망스러웠지만, 다시 건강해지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강한 정체성’ 속으로 돌아가 안심하게 된다. 건강으로 회복한 뒤에는 과거 아팠던 기억을 지우듯, 결국 다시 만나야 할 질병과 노쇠의 미래를 외면해 버리는 것이다.


이 책은 건강과 돌봄을 여러 각도에서 일깨워주고 있다. ‘건강한 몸’이 정체성인 사회에서 아픈 사람으로 살아가기, 아픈 사람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물음, 돌봄을 주고받는 당연함 등의 물음이 나를 찔렀다. 책을 읽으며 계속 이어지는 화두들을 통해 이상과 현실의 커다란 간극을 느꼈다. 변화의 방향은 알 것 같지만, 실현까지 가는 길은 끝없이 멀어 보였다. 그중에서도 내게는 특히 ‘돌봄의 주체’가 그랬다. 국가사업 이름인 ‘효나누미’가 왜 비난받는지 처음에는 온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나쁜 것인지, 그 부분을 다시 찬찬히 읽어보았다. 그동안 한 번도 그 가치가 잘못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을 돌보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었나? 가족을 돌보는 게 당연하다고 마음 깊이 느꼈다기보다는, 오히려 가족을 돌보지 못할 미래의 죄책감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생각이 다 가족 안에 묶여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요즘 1인 가구가 얼마나 많아졌는가? 당장 친동생 두 명도 1인가구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당장 내가 1인 가구가 아니라고 해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역시 언제든 1인 가구가 될 수 있는 데 말이다. 이렇게 돌봄을 하고, 또 받을 것을 생각해 보니 끝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이어졌다.


예전에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고 삶의 마지막에 대해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엄마는 연명치료 거부에 동의하셨고, 아빠는 대답을 하지 않음으로써 동의하지 않으셨다. 엄마는 ‘최대의 의료행위’를 받는 것을 거부하셨고, 아빠는 최선, 최대의 치료를 받고 싶어 하셨다. 엄마는 화장을 원하셨고, 아빠는 뜨거울까 봐 걱정하셨다. (아빠가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고 해야겠다.) 그러나 그 앞에 더 길고 험난하게 이어질 ‘견딤의 시간’을 어떻게 할지는 이야기하지 못했다. 잊고 있었는지, 혹은 애써 잊고 싶었는지 알 수 없다.


청소년 단편소설 [회색인간] 속 이야기가 떠올랐다. 책 속 먼 미래의 배경에 질병의 고통과 돌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모님을 가상세계로 이주시켰다. 가상세계로 가면 부모님은 아픔 없이 데이터화된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할아버지를 가상세계로 보내는 아빠를 본 딸은 죄책감 없이 곧 다가올 아빠의 가상세계 이주를 이야기한다. 새로운 이야기인 듯 보이지만, 익숙한 이야기였다. 이른바 ‘미래판 고려장’이다. 그렇다면 현실판 고려장이 요양원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부모는 여건상 어쩔 수 없이 요양원에 가야 했지만, ‘나는 가고 싶지 않다’고 느낀다면 그것을 온전히 부정할 수 없다. 맞다. 아직 닥치지 않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나 또한 뾰족한 해답이 없다. 이런 고민이 들 때마다 건강을 잘 지키시기를 바라며 눈감았다.


지금이라도 외면하지 않고 직면해야 한다. 문제를 꺼내서 이야기하고 서로의 지혜를 모을 때가 되었다. 그 시작으로 생각을 뒤집어 불편한 논의를 시작할 마음먹기에 좋은 책이다. 우리가 생각을 바꾸고 함께 고민하는 길만이, 이제 다수가 혼자 삶의 마지막을 준비해야 하는 시대를 맞아 더는 피할 수 없는 숙제라고 본다. 돌봄과 질병, 노년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단어들이 당장 들춰지는 순간, 아무 대처 없이 내던져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것을 내 손으로 들춰 ‘눈앞의 일’이라는 사실을 각인하고 함께 풀어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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