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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오늘 ; 그토록 바라던 하루

by Chloe J

오늘로 나의 모든 루틴은 마무리된다. 루틴이란 본래 마음과 생각을 담지 않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이유는 내일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마지막 오늘이다. 내일도 맞이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게 되면서, 아주 사소하고 작은 것들까지 새로움으로 다가온다.


4시에 울리는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더는 새벽이 없다는 생각 때문일까, 몸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아직 잠자리 독립을 못 한 딸이 내 팔을 베고 자고 있다. 어스름한 여명 속에서 딸의 얼굴을 바라본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이마에 조용히 뽀뽀를 한다. 슬픔이 올라오는 순간, 슬퍼할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슬픔보다 기쁨과 감사가 먼저다. 때로는 변덕스러운 엄마였던 나에게 한결같이 사랑을 표현해 준 사랑스러운 딸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한마디 덧붙인다. “좀 더 자렴.” 그러고는 토닥이며 자리에서 조용히 빠져나온다.


늘 하던 모닝 루틴처럼 서재로 향한다. 언제나 그랬듯 손에는 커피 한 잔이 들려 있다. 오늘은 조용히 책을 읽을 생각이다. 책장에는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많지만, 마지막으로 고른 책은 데미안이다. 일곱 번이나 읽은 책, 철없던 내가 남긴 흔적부터 한층 성장한 내가 적어 놓은 생각까지 그 안에 20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데미안과 싱클레어, 그리고 어린 나를 만나는 시간은 삶에 대한 깊은 질문으로 나를 이끈다. 나는 과연 알을 깨고 제대로 세상 밖으로 나왔을까?


책을 읽다 보니 남편이 수영 레슨을 간다며 나왔다. 오늘은 남편의 쉬는 날, 수요일이다. 나도 병원에 가지 않을 예정이니 남편과 브런치를 먹어야겠다. 학교에 가는 딸을 위해 아침을 준비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많아 제대로 차려주지 못했던 날들을 떠올리며, 오늘은 엄마와의 기억을 함께 담아 계란국, 콩나물, 시금치 반찬에 샐러드를 내놓는다. 딸이 쫑알거리며 밥을 먹는 동안, 딸의 이야기를 온전히 귀에 담는다. 오늘의 계획, 어제의 일들. 방과 후 엄마와 미술 전시를 보러 가자는 딸의 제안에 늘 그렇듯 “좋아!”라고 답한다. 물을 텀블러에 넣어 가방에 챙겨주고, 쓸데없이 무거운 것은 없는지 확인한다. 딸은 엄마의 세심한 보살핌에 기분이 좋은 듯하다. 딸의 마지막 등교를 함께 학교까지 걸어간다. 길가에서 참새가 총총거리며 뛰어가는 모습에 딸과 웃음을 나눈다. 교문 앞에서 한참을 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불룩한 가방만큼이나 삶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짧은 기도를 올린다.


늘 바빠서 허둥거리며 다니던 길을 오늘은 느긋하게 걸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왜 이런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는지 아쉬움이 몰려든다. 큰 숨 한 번 내쉬며 그 아쉬움을 날리고, 지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마음에 담는다.


남편과 함께 수영장 근처에서 아침을 먹는다. 마지막 하나 남은 소시지를 두고 늘 그랬듯 서로 먹으라며 권하는 상황. 오늘은 내가 먹는다. 행복을 한 점 더 가져간다. 평일의 여유를 느껴본 게 언제였던가. 이 기회에 남편과 산책을 나선다. 실개천을 따라 30분을 걸어 한옥마을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신다. 말이 많지 않아도 좋다. 손을 잡고 보폭을 맞춰 걷는 이 소소함이 곧 행복이다.


정리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꼈던 여러 공부 모임들에 감사 인사를 전하고, 리더를 정해 일을 마무리한다. 울지 않기 위해 큰 숨을 들이마시고, 부모님께 전화를 건다. 많은 탈과 원망이 있던 부모님이었지만, 지금까지 전화할 수 있는 엄마와 아빠가 계심에 감사하다. 슬픔 대신 기쁨을 남기고 싶어 옛이야기를 하며 엄마와 수다를 떤다. 전화를 끊으며 “사랑해요”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늦은 점심에는 사랑하는 친구와 카페에서 만났다. 커피와 달콤한 디저트를 나누며, 인사를 마치며 내일 다시 만날 것처럼 가벼운 작별을 하지 않았다.


딸과 약속한 미술 전시를 보러 갔다. 늘 그렇듯 내 목적은 회화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딸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오디오 가이드나 도슨트 없이 우리 마음대로 작품을 관람한다. 굿즈샵에서는 마음에 들었던 명화의 엽서 몇 장을 산다.


저녁은 늘 가던 찌개 전문점에서 해결한다. 익숙한 김치찌개와 계란말이, 그리고 이어지는 디저트. 이 모든 것이 영원할 것처럼 느껴진다. 집으로 돌아와도 익숙한 일상이 이어진다. 딸은 식탁에서 숙제를 하며 텔레비전을 보고, 남편은 게임과 텔레비전을 동시에 즐긴다. 나는 곁에 앉아 엽서를 쓰며 조용하고 고요한 시간을 보낸다.


잘 시간이 되었다. 오늘의 하루는 평범하고 익숙한 루틴처럼 보이지만, 오늘로 마지막이다. 오늘 내가 보낸 하루는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내가 꿈꾸던 하루다. 세 식구가 침대에 누워 얼굴을 맞대고 장난을 치다가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하루가 끝났다. 내 삶도, 내 생명도 그렇게 끝이 났다.




합평 모임에서 쓴 글입니다. 소재는 시한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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