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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숙 May 20. 2024

서귀포에 대체 뭐가 있는데?

씨리얼과 바나나 한 개를 먹고 아침 산책길에 나섰다.

어디선가 진한 꽃향기가 물큰 몰려와 주변을 돌아보니 건너편 데크로 이어진 산책길 난간에

진분홍색 꽃이 끝도 없이 줄을 지어 있었다.

내 폰 알람소리와 비슷한 진짜 새소리가 여기저기서 돌림노래하듯 소란스럽다.

..


육 개월만에 또 서귀포에 왔다.

사흘간 B와 느긋한 애월여행을 마친 뒤였으므로 이 곳에서는 사흘간 머물 예정이다.

애월에 머문 시간은 완벽했다.

호텔 방문을 열자마자 확 트인 바다가 코앞에 펼쳐진 광경에 잠시 숨이 멈췄다.

환상적인 바다풍경을 가진 곳은 원래 그런건지 그 곳에는 커다란 통창 앞에 널찍한 욕조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경험해보지 않았으니 욕조에 몸을 담그고 바라보는 바다풍경이 어떻게 다른지는 끝내 알 수 없었지만 사실 궁금해서 잠이 오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가까운 곳에 역시나 바다가 보이는 스타벅스가 있고 오른쪽으로든 왼쪽방향으로든 해변을 따라 산책길이 길게 뻗어있었다.

먹는 것에 대한 취향이 맞아 가난하게 먹다가 부자처럼 먹기도 하다가 사흘째 밤에는 스카이라운지에서 맥주를 마시는 호사도 부려봤다.

중간중간 주변에 있는 다양한 용도의 숙소를 들여다보기도 했는데

B는 그 중 한 곳이 마음에 쏙 들었던 모양이다.

가을쯤 한달살이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정말로 그 곳은 이전에 K와 내가 한 달을 살아 봤던 숙소들과는 달랐다.

그 곳에서 미리 하루 지내보고 싶다며 일정조정을 해서 함께 머물자고 했는데

그의 조정할 수 없는 일정이 끼어 있어 무산되기도 했지만 나 역시 서귀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B가 말했다.


“나는 서귀포는 딱히 당기지 않더라?”


나는 그냥 웃었다.

나도 궁금하긴 했다.

네이버지도로 두시간 삼십분이 걸린다는 완행버스를 타고 서귀포를 향해 오면서 생각해봤다.


‘대체 서귀포에 뭐가 있는데?’


숙소에 짐을 맡겨놓고 마침 장날인 오일장에 가는 버스를 탔다.

배는 고픈데 숙소에서는 그 곳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도 불편했다.

그냥 가까운데서 샌드위치를 먹을까 백반을 먹을까 하다가 결국 오일장 가는 버스에 올랐다.

장날에만 열리는 순댓국집이 있는데 갈 때마다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대기표가 있을리 없고 결제는 현금만 된다. 가게 안에 테이블은 몇 개 없고 가게를 빙 둘러 바테이블에 처음 보는 사람과 다닥다닥 붙어 앉아서 순댓국을 먹는다. 

제주 토종순대가 들어간 국밥이 맛있기는 하지만 그건 순전히 내 입맛일 뿐 깔끔한 국밥을 좋아하는 사람은 어쩌면 냄새가 난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공교롭게도 그 곳을 알게 된 건 B의 사진동호회를 따라 2박 3일의 짧은 제주출사를 왔을 때였다. 20년 쯤 지난 지금 B의 기억에는 이미 까마득하게 지워졌고 나는 제주에 갈 때마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 끼어앉아 순댓국을 먹는다. 

국밥 맛이 기가막히다거나 그 때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추억이 그리워서도 아니다.


작년 가을에는 9월과 11월 두 번 이 곳에 왔었다. 

매일아침 일곱시쯤 아침을 먹고 한 시간 쯤 산책을 하고 돌아와서 샤워를 한 후 글을 쓰다가 룸정비시간인 한 시에 나가서 점심을 먹고 스타벅스에 간다. 

네 시쯤 김밥이나 반미 샌드위치를 사 가지고 숙소로 돌아오는 것이 어느덧 일상이 되었을 때 집으로 돌아왔다. 

제주 어디가 좋더냐, 뭘 먹었냐, 추천할 만한 곳이 있냐, 고 물으면 마땅히 할 말이 없어 내가 미안했다.

지난 겨울부터 문득 한 번씩 그 때 일상이 그리워질 때가 종종 있었다.



숙소에서 내려오다가 횡단보도에 섰을 때 모퉁이에 삐죽하게 생긴 건물이 아직 비어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보니 지난 11월에도 9월에도 그 곳은 비어있었다.

그 곳이 토산품가게였다는 것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낡은 입간판이 말해주고 있었다.

천천히 걸으며 살펴보니 그 주변에는 대략 네 가지 유형의 변화가 있었다.

토산품 가게처럼 예전에도 비어있었는데 지금도 그런 곳이거나

예전에 뭐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못보던 새 카페가 들어서 있거나

전에 선술집이었던 곳은 간판도, 메뉴를 써 놓은 유리창도 그대로인데 입구 발판은 부서져있고 공과금 고지서가 문틈에 꽂혀있었다. 

그 중 놀라웠던 것은 지난 번에는 아침햇살과 함께 바다전망이 환상이었던 카페에 있던 요가교실이 무한리필 횟집으로 바뀐 사실이었다. 

더구나 그 곳은 내가 서귀포에 가면 묵는 숙소 2층에 있어서 더 충격이었다. 

그 곳은 몇 년전 K2가 워케이션을 다녀온 호텔이었다. 

호텔 이름이 ‘헤이, ***’라고 했을 때 어쩐지 그 말이 기분좋게 느껴졌다.

재작년에 한달살이를 갔을 때 뻣뻣한 K와 그 곳에서 아침 햇살 받으며 요가를 하는 동안 K의 곡소리를 들으면서 키득거린 적도 있었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서귀포에 끌렸던 이유가.

K의 어릴적 여사친이 살고 있을 뿐 아무 이유도 없는 제주에 갈 곳이 생긴 기분이었다.

제주 공항에 내리면 누군가 "헤이~ " 하고 말을 걸어주는 것 같았다.


호텔 이름은 그대로지만 내가 다음에도 그 곳에 머물지는 잘 모르겠다.

변한다는 건 이유나 목적이 있겠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겠다.

변화에 무디고 새로운 것이 낯선 나는 다음엔 어디로 가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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