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최악의 김밥이 있었다.
소풍 가는 날에만 먹을 수 있었던 김밥을 원없이 먹어보자고 했었다.
아마도 시골에서 쌀이 올라올 무렵, 남은 묵은쌀 처치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많이 하란다고 계속 퍼 담은 쌀이 어지간한 학교급식 수준이 되었다.
전기밥솥도 압력밥솥도 없던 시절, 커다란 들통에 쌀을 씻어 올리고는 엄마와 올케와 김밥 재료를 준비했다.
평소 엄마의 김밥 재료는 달걀, 시금치, 당근, 단무지, 그리고 어묵 정도였는데
그 날은 특별히 햄까지 가늘게 썰어 준비했었다.
이윽고 밥이 익는 냄새에 설레는 마음으로 솥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뭔일인가.
살짝 타는 냄새는 나는데 위에는 설익은 쌀이 푸수수 흩어졌다.
평생 안 해보던 양의 밥을 하려니 물을 맞추기에 실패를 했던 거다.
다시 물을 뿌려가며 쌀을 위 아래로 뒤적여 뜸을 들였지만 생쌀의 상태만 겨우 모면했을 뿐
여전히 까끌거리는 쌀은 참기름과 깨소금 포장으로도 해결이 되지는 않았다.
식구들이 둘러앉아 마는 김밥은 순식간에 산처럼 쌓였다.
소풍날에는 꼬투리 나오기만 기다리다 김밥을 써는 순간 순식간에 사라지던 김밥이
그 날은 도무지 줄지를 않는다.
하여 고두김밥을 꼭꼭 씹어서 그 날 세 끼를 먹고도 며칠을 더 먹었다.
찜솥에 쪄보기도 하고 썰어서 프라이팬에 구워보기도 했지만 덜익은 쌀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 걸 끝까지 다 먹었는지 도무지 먹을 수 없어서 중간에 버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쯤 됐으면 김밥이라면 꼴도 보기 싫어질 만도 한데 나는 아직도 김밥을 좋아한다.
예전에 살던 동네에서도 그랬고 지금 이 곳에서도 가성비 좋은 김밥집을 알아낸 이후
한 때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점심으로 김밥을 먹은 적도 있다.
제주에 갔을 때 이번에는 애월에 숙소를 정했었다.
환상의 자전거도로가 지나가는 한 가운데 자리잡은 리조트였는데 바다 가까운 곳은
가로로 길게 호텔이 있고 그 뒤로 언덕을 따라 있는 3층짜리 아담한 빌라가 그 곳이다.
바다에 가까이 있지 않으니 바다풍경을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멀리 바다도 보이고 주변도 깔끔해서 지내기 좋았다.
문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불편해서 뚜벅이 여행자에게는 어려움이 있다는 건데
어차피 한 곳에 머물 예정이었으니 특별할 건 없었다.
그 곳이 좋은 이유중 하나는 호텔 옆에 전망 좋은 스타벅스가 있다는 점이었다.
맛있는 음식에 큰 관심은 없으나 세끼 끼니는 거를 수 없으므로
아침은 씨리얼에 바나나 한 개, 점심은 스타벅스 샌드위치와 커피 그리고 저녁은 김밥으로 하기로 했다.
숙소에서 내려와서 왼쪽 언덕을 넘어가면 예전부터 이미 알고 있던 A김밥집이 있는데
전복김밥이 대표메뉴라 김밥 값치고는 만만치 않지만 그래도 한 두 번은 괜찮겠다 싶었다.
왜냐하면 이 곳은 여행지니까.
오른 쪽 바닷가 산책길을 걸어 언덕을 올라 한참 걸어가면 그 곳에는 B김밥집이 있다.
반가운 마음에 아침 산책길에 들렀다.
무심코 메뉴판을 보고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기본 김밥이 육 천원으로 시작해서 참치, 날치알은 팔 천원, 흑돼지 불고기였던가? 뭐 암튼 그 다음이 무려 만오천원, 을 보고 놀라서 입이 딱 벌어졌는데 세상에나 그 밑에 또 있다.
딱새우튀김 김밥, 이만 원.
그 집에 세 번 갔었다.
기본김밥을 사면서 ‘도대체 얼마나 특별하길레.’ 라는 궁금증때문에 키오스크 결제 단계로 넘어갈 때마다 갈등했다.
결국 육천원 짜리 제일 싼(?) 김밥을 사 가지고 돌아오면서
‘한 번은 먹어봐야하나? 에이 됐어. 김밥은 김밥이지. 너무 비싸. 그래도 먹어보고 말을 해야하는 거 아닌가?’
라는 마음의 소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다음 날에는 A김밥으로 가는 중간에 새로 김밥집이 생긴 걸 발견했다.
두 달전에는 타이음식점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새 바뀐 모양이다.
아무리 제주도라지만 주변은 황량한데 주택 1층이 식당이라는 점도 그렇고
외부에 내 놓은 메뉴에 의하면 김밥전문이 아닌 고사리해장국과 흑돼지가 있어 정체성에 의심이 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가 봤다.
안으로 들어서니 예상과는 달리 내부가 꽤나 깔끔했다.
수순처럼 메뉴판을 봤다.
기본 김밥이 사천원, 그리고 김밥류는 모두 팔 천원이었다.
팔천원 김밥에 이미 적응이 됐는지 놀랍지도 않았다.
제주도 김밥값이 미쳤네 하다가 어쩌면 내가 김밥물정(?)을 오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 날좋은 토요일, K와 동네 산책길에 나섰다.
그 동안 공사중이었다가 완공된 건물도 있고 물건을 뺀 빈 점포도 생겨있었다.
길 건너 다음달 입주라는 재건축 아파트는 나와 아무 상관은 없지만 그 주변으로 좁아서 복잡하던 도로가 넓어져 환해진 것은 꽤나 기분이 좋았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김밥의 가격 상한선은 얼마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ㅇㅇ김밥이 제일 가성비가 좋다고 생각해.”
“아니 그 말이 아니고, 엄청 특별한 김밥이라고 하면 최고 얼마까지 내고 먹을 수 있냐는..”
“오천원? 아무리 귀한 김밥이라고 해도 결국 김밥은 김밥인데 오천원 이상 주고 먹을 생각은 없어.”
“그렇군.”
나도 역시 이만원짜리 김밥이 궁금하기는 하지만 굳이 그걸 먹으러 그 곳에 다시 갈 생각은 없다.
한, 만원 쯤이라면 또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