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여행
유럽여행이 오랜만이다보니 호텔조식도 설렜다.
일곱시에 오픈한다는 식당에 일곱시 땡치자마자 들어가기 민망해서 일곱시 삼 분에 내려갔다.
이미 몇몇 사람이 줄을 서 있었다.
방 호수를 말하고 안내 해주는 자리로 가는 모양이었는데 우리에게는 저쪽 창가 아무데나 앉으면 된다고 했다. 바빠서 그런가보다 했다.
메뉴는 다양하고 정갈했다. 특히 빵이 맛있었다.
타고난 위장이 협소해서 식사량이 크지 않은 터라 뷔페는 늘 괴로웠다.
욕심을 부려봤자 속이 부대껴 금방 후회하게 될 것을 아니 최대한 자제해서 담은 것이
빵과 샐러드, 후식으로 커피와 과일이었는데 어찌된 것이 유럽에서는 자판기 커피도 맛있다.
두 번째 날에는 신청해놓은 근거리 투어에 참여하기 위해 지하철을 갈아타고 약속장소에 갔다.
프로 계획러에다 시간강박까지 나눠가진 우리가 도착한 시각은 약속시간에서 오십 분이나 이른 시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 일곱시 삼십분에, 만나는 장소는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고 가야하는 곳인데다 전날부터 지각하면 절~~대로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엄포를 실시간 톡으로 받았던 터라 간밤에 잠이나 제대로 잤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6학년이라는 사내아이와 엄마가 한 팀이었고 직장 그만두고 다음 직장에 출근 할 때까지의 틈새 시간에 유럽을 여행중이라는 풋풋한 청년이 오늘 함께 할 그룹이라고 했다.
목적지는 옥스퍼드와 코츠월드였는데 사실상 여행일정표에서 여러번 글자로 읽기만 했지 그 곳이 어떤 곳인지는 잘 몰랐다.
코츠월드에 접어드는 동안 머릿속에는 자연스레 빨간머리앤이 떠올랐다.
한 때는 앤의 조그마한 책상도 탐났고 손을 씻으라며 부어주는 도자기 물주전자도 갖고싶었으며 풋풋한 풀냄새가 날 것 같은 앤의 다락방도 부러웠던 적이 있었다.
영국인들이 은퇴후 살고 싶어하는 곳이라고 하는데
이미 삼중 오중 새시로 꼭꼭 걸어잠그고 사는데 익숙해진 터라 차가운 돌 벽에 얇은 유리 한 장으로 바람을 막는 오백년 넘은 집들은 그냥 보는 걸로 만족해야할 것 같다.
와중에도 가는 곳마다 마을은 그냥 풍경화였다.
더도 덜도 말고 한 일주일만 살고 싶었다.
나도 알고 있는 유수한 명문 대학의 근원이 옥스퍼드였다는 사실도, 그 옥스퍼드가 단순히 길정도가 아닌 하나의 마을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특히나 대학건물과 건물 사이에 개인 주택이 있고 집주인이 팔 마음이 없어서 대학이 세를 내며 사용하고 있다는 얘기는 웃음이 나왔다.
그 건물에서 나왔다는 유명인들의 이름을 내가 지금까지 기억할리는 없고 나는 그냥 그 문 손잡이를 잡고 찍은 사진을 보며 ‘아 여기가 거기구만.’ 하겠지.
“나는 청각장애인이라 소리를 잘 못들어요.”
라며 또렷한 발음으로 말하고는 해사하게 웃던 청년은 가는 곳마다 폰을 가이드에게 내밀며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는데 그 표정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세 번째 날에는 습관처럼 일찍 눈이 떠지는 바람에 어둑한 거리로 아침 산책을 나갔다.
한 때 인간 내비게이션이라 불리던 K가 ‘난 아직도 템즈강 방향이 헷갈려’라고 했다.
아닌게 아니라 대충의 일정을 추천해주던 온라인 친구 말로도
세인트폴 대성당이나 코벤트 가든은 다리 건너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거리라고 했었다.
런던에서의 5일이 촉박할 수도 있지만 K나 나나 걷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그런 곳은 몇 번이고 지나치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과는 다르게 그러지 못했다.
우리는 남들 다 가는 관광지 같은 곳 말고 소롯소롯 골목길을 걸어보자고도 했는데
결국 그런 길은 모두 관광지에 가야 비슷하게 만날 수 있었다.
뭔가 런던에 대해 크게 오해를 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에도 정시에 식당에 가게 됐다.
이번에는 다른 직원이 자리를 안내했다.
두 번째였지만 그래도 조금 여유가 생겼는지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처음엔 그냥 무심하게 봤는데 첫날 만났던 그 매니저의 행동이 눈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투숙객이 들어오면 방 번호를 물어보고 자리를 안내하며 뭔가 묻는 거였다.
가만히 보니 식당 한쪽에 커다란 진열장이 있었는데 테이블칸에는 스테인리스 포트가 줄서있었고 선반에 칸칸이 있는 네모난 박스는 티라고 K가 말했다.
몇 번의 손님을 맞는 그의 태도를 보니 방호수를 물어보고 자리를 안내한 다음에는
‘티 마실래? 커피 마실래?’를 묻는 거였다.
“근데 왜 우리한테는 안 물어봐?”
“저 자식이 동양인이라고 차별하는 거지 뭐.”
K는 그걸 이제 알았냐는 표정으로 채소를 한 입 물고는 우적우적 씹었다.
“아니 뭐 자기도 영국 본토사람처럼은 안 생겼구만.”
그 다음 날에는 엘리베이터에서 에이프런을 두른 식당 직원을 만나 식당까지 함께 들어갔다.
키가 K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것 같은 가무잡잡한 직원은 친절하게 손수 호수 확인을 하고 자리까지 안내해준다.
돌아서려는 그에게 혹시 차를 마실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활짝 웃으며 잉글리시브랙페스트 티를 말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알았다고 곧 갖다 주겠다고 하고는 쌩하니 사라졌다가 금방 예의 그 은빛 포트와 작은 우유병을 들고 나타났다.
나는 공연한 치기가 발동해서 한 마디 더 주문을 했다.
“이거 우유가 찬데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을까요?”
물어 놓고도 ‘그게 될까?’하고 있는데
왜 안되겠냐며 또 금방 갖다 드리겠다고 하더니 사라진지 채 오 분도 안 돼서
따끈하게 데워진 우유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자기가 한술 더 떠서는, 원한다면 좀 더 진한 티로 줄 수도 있다고 했다.
K가 강한 게 더 좋다고 하니 걱정 말라며 생긋 웃으며 사라졌다가
다시 다른 팟을 들고 나타났다.
전날의 매니저에 대한 서운함과 억울함 비슷했던 감정이 스멀스멀 잊혔다.
그 다음 날에도 산책 후 식당에 갔더니 매니저가 호수만 확인 후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저 쪽에 좋은 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했다.
차를 마실 거냐고는 안 묻냐고 물으려다가 참았다.
왜냐하면 그건 시비가 될뿐 나나 K는 홍차보다 커피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너 운 좋은 줄 알아. 우리가 홍차펄슨이었으면 너는 죽었어. 뿌드득...’
그런데 이상하다. 식사가 다 끝나가도록 전날 그 친절했던 직원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