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울컥함이 몰려온다. 쏟아지는 눈물을 참아 내기가 여간 쉽지가 않다. 마음껏 울어 버린다고 후련하게 씻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계속 애절함만 몰려온다.
잊을만하면 눈에 띄는 아동학대 관련 기사는 내 오른쪽 마우스 클릭 버튼에서 항상 제외된다. 매번 안타까운 결말과 자극적인 내용들은 쉬 가시지 않는 여운을 남기기에 일부러 피해 가는 것이다. 이번 정인이 사건도 어느 기사처럼 의도적인 ‘안 읽음’으로 지나칠 수 있었다. 내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는 안 보는 게 상책인 사건인 것이다.
그렇게 일부러 피해 다녔것만 정인이의 사진을 보고 말았다. 마우스 클릭과 상관없이 제목만 노출된 기사와 함께 떡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거무튀튀한 얼굴로 양쪽 어깨에 붕대를 감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그 얼굴 표정은 내게 여러 가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16개월 아기의 표정에서 오랜 시간의 고되고 고통스러운 아픔을 애써 참아내고 있음을 순간적으로 읽었다. 너무 가슴이 아파 그 사진을 오래 쳐다볼 수 없어 시선을 바로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표정이 계속 뇌리에서 맴돈다.
또 울컥함이 몰려오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런 내 연약함에 더 화가 치밀어 자괴감으로 무기력함까지 몰려온다. 물론 나름 내 자리에서 내 역할을 해내겠다며, 국민청원에 동의하고 학대받는 아동들에게 얼마의 후원금을 보내는 고작 그 정도의 행동을 취하겠지만 그것도 결국 자기만족에 불과하겠다.
이럴 때 내가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왜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고 있는데 좀처럼 나아지지 않을까? 시대는 빠르게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다는데 왜 아동학대는 항상 그 자리인지 정말 모르겠다.
어디서라도 답을 얻고자 코로나 19로 더 소원해진 교회지만, 오랜만에 성경을 들쳐봤다. 마가복음 10장에 어린이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어린이들을 제자들은 꾸짖는다.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에게 노하며 어린이들을 안아주며 축복하고 안수한다. 성경의 맥락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겸손한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예수님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에 더 집중해서 비슷한 성경말씀들을 찾아봤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그 당시 제자들은 아이들을 나약하거나 귀찮은 존재로만 바라봤다. 그런 생각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로 나타났기 때문에 가로막고 밀쳐낸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이들을 그렇게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존귀한 존재라 말씀하시며 천국이 어린아이들의 것이라며 높이셨다. 그런 마음이 태도로 나타나 아이들을 사랑하고 축복해 주신 것이다.
내 자신을 돌아보았다. 내 아이를 대리만족의 도구, 내 소유물, 스트레스의 제공자로 보고 있지는 않은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를 것이라 생각해서 그 앞에서 함부로 행동한 건 아닌지... 결코 떳떳하지 않았다. 결국 그러한 태도들이 무시, 언어적 폭력, 폭행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리라. 투표권이 없는 나약한 존재라 생각해 정치적, 제도적 보호장치가 부족해서만은 결코 아닐 것이다.
나부터 태도를 바꿔보자. 순수함과 미래를 책임질 꿈나무들이라 거창하게 포장하지 않아도 그냥 그 존재함만으로 귀하게 바라보자. 힘없고 가난하고 병들고 늙었어도 그 누구도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친절하게 대하는 태도를 몸에 익히자. 그런 습관이 더 많은 사람들의 몸에 배어 있다면 그 어떤 사회적 보호장치보다 ‘정인이’와 같은 사건을 충분히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정인아’ 나중에 천국에서 만나면 함께 신나게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