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극, 공정성, 대화와 타협
나는 청개구리 기질이 조금 있어서 재밌다고 소문나면 일부러 늦게 보는 편이다. 한 주 한 주 기다리며 한 편씩 보는 게 감질나기도 하고 스포에 그리 예민한 편이 아니라 결말까지 다 나온 다음에도 호평이 있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그렇다.
흑백요리사 : 요리 계급 전쟁, 그렇게 재밌다고 난리가 났더라. 출근하면 주변에서 수군수군, SNS에 들어가면 요약본이 득실득실하니 말이다. 심지어, 인터넷 뉴스를 읽어도 흑백요리사 밈이 여기저기 들어가 있어 나의 관심을 제대로 끌었다. 그래서 1화를 봤다. 재밌더라. 그래서 쭉 봐버렸다. 왜 재밌게 봤는지 감상평을 남겨본다.
흑수저와 백수저로 나누고 경력이 비교적 짧은 요리사가 경력이 쌓인 요리사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는 기본 골제 자체는 자극적이다. 하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여타 오디션 프로그램에 비해 자극성이 덜 하다. 이유는 제작진의 과도한 개입, 무리한 경쟁 시스템을 집어넣어 MSG 범벅인 맛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경연 참가자들 간의 상호 존중과 신뢰 속에서 경쟁이 펼쳐지기 때문.
흑수저끼리 경쟁하는 1차 경연에서도 모두 경쟁하는 사이이지만 서로 힘내라며 응원을 하는 모습을 보인다. 경쟁하는 흑수저를 위에서 바라보는 백수저도 경연 내내 흑수저를 향해 응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백수저와 흑수저에 속한 100명의 요리사들은 장르는 다를지 언정 요리라는 거대한 울타리에 함께 속해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흑수저와 백수저 누군가 경연에서 져 탈락해도 내가 왜 떨어지니, 네가 왜 붙니 식의 불만이 없다. 경력은 다르지만 서로 간의 실력과 노력에 대한 존중이 있어 깔끔한 대결이 가능해진다.
일부 오디션 프로그램의 경우 항상 공정성이라는 논란이 따라왔다. 이 참가자가 왜 붙냐 혹은 떨어지냐, 이 심사위원이 심사할 자격이 되냐 등의 논란 말이다. 흑백요리사는 치밀한 설계를 통해 이 공정성이라는 논란이 최대한 나지 않게끔 만들었다. 일단, 심사위원으로서 안성제와 백종원이라는 국내 최고 셰프와 요리 연구가를 섭외해 흑수저, 백수저 참가자 모두 심사에 대해 수긍하는 모습을 보인다. 참가자들이 두 심사위원을 존중을 넘어 존경하는 모습은 보는 시청자에게도 그대로 전해지며 두 심사위원의 선택과 경연 결과에 있어 신뢰성을 높여주는 효과를 만든다.
여기에 눈을 가리게 만들거나 랜덤한 식재료를 주제로 대결을 펼치게 만드는 시스템은 흑수저와 백수저를 거의 동등한 위치에서 맛 하나만으로 승부를 하게 만든다. 시각을 제한하니 누가 어떤 요리를 만들었는지 몰라 맛 하나에만 집중하게 만들어 버린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진행해 왔던 경연 프로그램을 보면 참가자가 경연 이전에 갖고 있던 인기와 이력이 경연 결과에도 결과를 미치는 경우가 있기도 했다.
흑백요리사 제작진은 두 심사위원의 눈을 가림으로서 공정성의 시스템을 탄탄히 하는 효과를 만든 것은 물론 재미까지 챙긴다. 두 심사위원이 더듬더듬 입을 벌려 음식물을 받아먹고 그동안의 데이터를 총 동원해 어떤 음식인지 알아맞추는 모습은 흑백요리사를 재밌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로 작용했다.
우리는 타인과 의견 차이가 발생했을 때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알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잘 되지 않는다. 지연, 혈연에 얽혀 선택이 종용되거나 다수결로 밀어붙여버리는 일이 사실 흔하다. 당장 뉴스만 틀어도 우리나라 정치권은 대화와 타협은커녕 정파적 논리에 의해서만 행동하며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전쟁에서도 끔찍할 정도로 이기적인 모습만 보여준다.
다수결의 논리로 결정을 내리는 것도 사실 정답이라고 보긴 어렵다. 다수의 선택이 나중에 가서 틀리기도 하고 선택받지 못한 소수의 불만은 잔존하고 있기도 하다. 대다수 경연 프로그램에서는 안전한 선택과 진행을 위해 심사위원을 홀수로 구성하여 다수결로 진행하는 것과 다르게 흑백요리사는 심사위원을 단 두 명으로 제한하여 우리 사회에서 실종된 모습인 대화와 타협을 실현해 낸다.
심사위원이 두 사람이기 때문에 다수결로 결정될 수 없고 두 사람은 의견 도출을 위해 서로 대화하고 타협해야만 한다. 그래야 프로그램이 진행되니 말이다. 쉽게 의견이 조율되는 경우도 있지만 우스갯 소리로 싸울 뻔했다고 할 정도로 둘의 토론은 흑백요리사를 지켜보는 하나의 포인트이기도 하다. 최고의 위치에 있는 두 심사위원이 더 설득력 있는 논리로 다른 심사위원의 선택을 바꾸게 만드는지는 시청자를 흥미롭게 만든다.
여기에 일방적인 다수결의 논리나 권위, 지연, 혈연에 의한 결정이 아닌 두 사람의 타협으로 인한 결정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사회에서 잘 보기 어려운 모습이니 말이다.
넷플릭스이기 때문에 광고, ppl 요소가 적어 시청 몰입감을 주는 게 아닐까. 넷플릭스가 아니라 방송국에서 했다면 제작비 때문에 ppl과 광고가 들어가 중요한 타이밍마다 100초짜리 광고가 들어갔을 것이다. 흑수저와 백수저 누구의 대결 결과는 60초 광고 뒤에 공개됩니다 라는 식이거나 중간에 뜬금없이 올리브영이나 쇼핑몰에 가서 쇼핑을 하거나 서브웨이, 특정 음료수를 중간중간 마시거나 요리는 특정 제조사 제품으로만 만들게 하는 식. cj였다면 비비고 제품을 대놓고 전시하고 사용하는 장면을 넣을 텐데 흑백요리사는 그런 모습이 거의 없다.
물론, PPL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경연 중 하나로 같은 모델의 냉장고를 수십 대 놓는 모습이 PPL이긴 하지만 시청자가 직접적으로 느낄 만한 정도는 아니다. 넷플릭스가 아닌 케이블, 지상파에서 방송했다면 상표가 직접적으로 노출되거나 냉장고 기능에 대한 설명이 더 들어갔을 것이다.
10월 8일을 기준으로 흑백요리사는 끝이 났다. 시즌 2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진행하게 된다면 시즌 1의 흥행 요소가 잘 이어지면 좋겠다. 단순히, 스타 셰프와 백종원이 출연해 흥행한 게 아닐까라는 피드백이 남지는 않았겠지. 마지막으로 흑백요리사에 대한 개인적인 심사평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흑백요리사의 재미는 이븐하게 잘 익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