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탐구해보기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남들에 비해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좋았다. 나이를 앞서간 생각을 하고 웬만한 일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성숙에 대한 나의 정의였다. 고등학생 때는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게 맞나'라는 생각을 하며 내 눈앞에 보이는 사회를 두려워했다. 아이들이 줄 세우기에서 떨어져 나가는데 그들의 죽음은 누가 책임져주는 걸까. 회사의 기계 같은 아빠는 자기 존재에 대한 실존적 의식을 가지고 있을까. 사람들은 자기가 진정 원하는 것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나의 실존에 대해 고민했다. 나는 어떤 인간으로 살고 싶은가. 하이데거를 읽고 카프카를 읽었다. 단순히 눈앞에 내 성적이 중요한 게 아니라서 성적에 목을 멜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반드시 그러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 와중에 친구들은 숫자 하나에 목을 메고 있었다. 세상이 무언가 이상하다. 이대로는 안된다. 무언가가 바뀌어야 한다.
그 뒤로 이 글을 쓰기까지의 나는 무얼 했을까. 대학에 와서는 마르크스와 아도르노, 하버마스와 푸코를 접했다. 현안을 살피기 위해 신문과 칼럼도 읽어댔다. 결국 내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바뀌지 않고 나도 그 문제점들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일상을 살아갈 수 없는 슬럼프에 빠졌다. 주변 사람들이 집중하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나에겐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과외를 받는 학생이 기본 영단어를 몰라서 불평을 하는 다른 친구들이 한심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왜 우리는 이런 사교육의 늪에 빠지게 되었고 입시 비리를 저지르게 되었으며 왜 사람들은 대학생이 가담하는 일종의 '정당한 물물거래'의 일환인 과외 수업이 '서울대 신화'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려고 하는지가 나에겐 의문이었다.
이러한 고민들은 나를 탐구와 비판의 세계인 학문의 문턱으로 이끌었고 현실을 마주하는 문은 조금씩 닫히게 되었다. 과거의 그 정의감은 사회는 나 혼자서 바뀌지 않는다는 실망감에 주춤하게 되었고 다수의 사람이 가진 “그게 뭐 어때서? 당연한 거 아니야? 현실이 그래, 어쩔 수 없어.”라는 생각들을 보며, 그리고 당연하게도 돌아가는 '주류의 갑질'을 보며 내가 정말 이방인이 된것 같은 우울감에 빠지게 되었다. 나는 성숙하지 않을뿐더러 내가 말한 성숙은 좋은 게 아니었다. 혼자 곪아지는 것의 징후이자 아파지는 것의 지름길이었다.
나는 아직 내가 파고들고자 하는 아픈 것들의 궤도에 근접하지도 못하였다. 학문을 시작하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와 고민과 끈기가 필요하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이 나를 너무 나약하게 만든다. 그래도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 글자로만 만난 여러 학자들, 책 속의 아버지와 어머니 같은 그들과 더불어 현실에서도 행복한 사회를 꿈꾸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아프다는 것은 연민의 객관적인 척도가 아닌 공감을 호소하는 나의 주관적인 시각에서 나온 말이다. 모두가 아는 물리적인 아픔은 공유되기도 한다. 공을 머리에 맞으면 혹은 독감이 걸리면 아프다는 것을 모두가 아는 것처럼 어떤 것에 관한 경험이나 견해가 있다면 공감을 하기 쉽다는 것이다. 보이는 게 아닌 안 보이는 것들에 대해 마음으로 공감할 수 있는 시야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인류란, 인간이 밟아온 이 발자취는 연속적이고 우리는 과거보다 성숙한 사회를 꿈꾼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쓰고, 상상력을 공유하길 바란다. 문을 항상 열어두고 함께 상상을 하자. 혼자는 나약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불쌍하고 또 가까이 여기자. 측은지심 같은 건데, 무엇이 불쌍함을 느끼는 주체이고 불쌍해지는 객체인지 구분이 가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거다. 내가 주체가 되어 세상을 불쌍히 여긴다고 생각하다가도 유한한 인간인 나는 세상 안에서 불쌍한 객체가 되는 뒤틀림 같은걸 느끼며 아픔을 헤아리고 싶다. '나'라는 의사가 청진기를 메고 아픈 세상을 진단하려고 하는데, 사실 나도 암환자인 꼴인 게 숙명인 것만 같다. 아픈 것의 속죄양을 만들어 홀로 고고하게 동정을 주는 존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환자라고 해서 가만히 있을 것인가. 어쩌면 아픈 것에 파고들고자 하는 것은 나에 대한 탐구인 것도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