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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희 마리아 Jun 18. 2024

프롤로그 1

이 글을 쓰기까지 참으로 긴 시간을 보냈다. 뭔가를 말하지 못하는 답답함과 말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눌려 지냈다. 쓰려고 하면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감정과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가야 한다는 중압감이 무서워서 미루고 미루었다.  


이제는 이야기를 해도 될 만큼 마음속 이야기가 숙성된 걸까. 더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모두가 생각하지만 말하지 않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언제나 우리 곁에서 어른거리고 있는 죽음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10년 전인 2014년,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90세의 연세로 돌아가셨다. 그때 90세는 상당히 장수하는 연세였다. 돌아가시기 1년 전부터 암으로 고생하셨는데 처음에는 크게 통증을 호소하지 않으셔서 노령의 분들이 흔히 겪는 노환 정도로 생각했다. 혼자서 병원이나 약국을 찾아다니셨지만 는 분이라고 생각하여 그렇게 유념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워낙 말이 없으셨던 아버지는 기분 나쁘게 아파오는 통증을 이겨보기 위해 운동을 열심히 하시면서 동네 병원들을 찾아 병명을 알아내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렇지만 동네 병원에서는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하고 노환으로 취급하여 1년여를 그렇게 지내시다가 결국 암으로 진단을 받으셨다. 병원과 집을 오고 가기 10개월여, 큰 통증이나 고통을 겪지 않고 지내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노년의 부모님을 모신다는 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큰 오빠네가 부모님을 모셨는데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서 각자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문안하며 두 분을 돌보는 참으로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형태였다.


그렇지만 부모님의 연세가 많아지고 병환이 잦아지면서 가족 관계는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전에도 모시는 입장과 모시지 못하는 입장이 갑을 관계 같은 미묘한 긴장을 야기하였는데 아버지가 아프시면서부터 더욱 무겁게 팽배해진 긴장은 막 깨지려는 살얼음처럼 위태로웠다.


모시는 쪽에서는 죽음을 향해 가는 아버지를  지키면서 병시중과 잡다한 수발로 개인적 생활은 중단되었다. 부모님을 끝까지 잘 모시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였겠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병수발과 피곤, 긴장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수시로 병원으로 뛰어가고 밤잠을 설치면서 들여다 보고 종일 곁을 지켜야 하는 수고와 노동이 노년의 오빠 내외에게 대단한 인내와 희생이었을 것은 너무도 자명하였다.


모시지 못하는 쪽의 입장도 편한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을 맡겼다는 미안함에 항상 죄스러웠다. 매주 쫓아 올라가도 손님 밖에 되지 못하고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는 처지가 미안하였고, 피곤에 절어 살갑지 못한 모습을 보는 것도 불편하였다. 마주 앉아도 말이 없었고 서로 마음속으로 기다리는 것은 같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마지막 길을 가시는 아버지께  죄송하고 미안해서 머릿속은 복잡했고 가슴은 답답하였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어떠했으랴. 뭐가 먹고 싶다는 말 한 번 하신 적 없고 당신의 고통을 한 번도 호소하지 않으셨지만, 어찌 아프지 않고 어찌 눈치가 없으셨으랴. 자식들의 얼굴이 굳어가고 말이 없어져 가고 퉁명스러워 가고 손길이 거칠어 가는 것을 어찌 느끼지 못하셨으랴. 혼자 가야 하는 길 위에 서서 누구에게도 당신의 두려움과 외로움과 고통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다가오는 죽음 앞에 서 계셨을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하셨으랴.


아버지가 떠나실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별할 시간을 갖지 못하였다. 아버지의 죽음이 목전에 임박했는데도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직 살아 계시는 분 앞에서 죽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장례 절차 등에 대한 이야기가 간간이 오갔지만 아버지와의 마지막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고 급박한 현실적 상황 속에서 그럴 만한 여유도 갖지 못하였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고  얼마나 견뎌내야 하는지 모르면서 참아내야 하는 시간은 막막하였다. 남은 시간이 얼마였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기꺼이, 더 다정스럽게, 더 효도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앞일을 아는 것이 복일까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다. 알면 갈 수 없는 길을 모르니까 가는 경우도 많다. 길지도 않은 10개월 후에 아버지는 집에서 오빠의 품에서 돌아가셨다.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바람직한 임종이셨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맨 처음 든 생각이 '고맙습니다, 하나님'이었다. 아버지의 존엄성과 품위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이상 죄짓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로의 고통이 끝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수없이 되뇌었고 기쁘기까지 하였다.


성대한 장례를 치렀다. 난  차질 없이, 실수 없이 장례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과 손님 접대에 신경을 쓰느라 장례가 아버지와의  영원한 이별의식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였다. 배운 적도 없고 경험해 보지도 못한 일이었다. 애도보다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과 미묘한 감정싸움과 눈치의 줄다리기에서 벗어났다는 홀가분함이 더 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애도의 시간이 없었다. 형제들은 장례를 치른 뒤에 바로 일상으로 돌아갔고 아버지가 오래전부터 안 계셨던 것처럼 아버지의 이야기를 피하였다. 각자의 자리에서는 각자의 모양으로 슬픔을 삭혔겠지만 모였을 때는 의례적인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가 가시고 난 10년, 장례로 끝난 것 같았던 아버지의 죽음은 나에게는 끝나지 않았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애도해야 할 것을 애도하지 못하고 참회해야 할 것을 참회하지 못하는 마음에 눌려 지냈다. 이렇게 고백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자식이었다고...  자식들의 이런 마음을 생전에 익히 보고 느끼고 알고 계셨을 아버지께 참회하고 싶었다고. 마지막 가시는 길을 너무 참담하게 해 드렸다고 목놓아 울고 싶었다.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 번도 마음 놓고 울지 못하였다. 울음은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고 마음은 얼음처럼 차가워졌고 돌덩이처럼 메말라 갔다. 아무에게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할 수 없었고 하지 못했다.


 가장 중요하지만 두려운 것. 죽음이라는 주제는 가능하면 생각하지 않고 말하지 않고 피해야 한다는 생각하였던 것 같다. 한시도 죽음을 잊지 않고 이러저러한 죽음을 목격하지만 방치하거나 피하는 것으로 대처하였다. 죽음이 과연 뭘까. 끊임없이 죽음에 대해 알기 위해 찾아다녔다. 죽음에 관한 책과 자료들을 찾고 강의를 찾아들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나에게 이렇게 길게 남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두렵고 무섭다. 왜 무섭고  두려운지 모르면서 우리 모두는 죽음의 공포 앞에 서 있다. 듣고 싶지 않아도 이러저러한 죽음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다. 죽음은 무엇인가. 죽음은 과연 두려운 것인가. 언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그 이야기를 하고 싶고 듣고 싶었다. 우리는 죽음을 어찌해야 하는가. 모른 척해야 하는가. 아는 척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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