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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Oct 17. 2020

한 사람이 있었다

>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참 오랫동안 책 속에서 살았다. 그는 책 속에서 사람을 만나고, 또 다른 자신을 만나고, 꿈을 만나고, 미래를 만났다. 그에게 책속은 참 편안했다. 바닷가에서 조개를 줍듯 글 속에서 문장을 줍고 단어를 줍고 한참을 들여다보며 소리 없이 웃기도 했다. 때론 문장에 울기도 하고 아파하기도 했으며 글자가 가진 온도에 깜짝 놀라 가만히 손에 꼬옥 쥐고 있기도 했다. 그에게 책속은 참 편안하고 따뜻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를 허락한 장소처럼 느껴졌으며 유일하게 그가 있어주길 바라는 곳, 그가 있어도 되는 곳, 그가 있고 싶은 곳처럼 느껴졌다.


“내 머리는 가슴을 억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나쓰메 소세키의 <피안 지날 때까지>예옥, 2009, p253)


책 속에서 살던 그에게 있어, 그의 머리는 가슴을 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언제나 그의 생각은 해야 할 이유보다는 하지 못할 이유를 찾아내었고 시작은 언제나 끝을 함께 상상하게 했다.


책 속에 살던 그는 삶의 답을 찾기 위해 언제나 책을 펼쳤다. 눈썹을 찌푸리며 고민하게 만드는 문제들 앞에서 그는 언제나 책들에게 물었다.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책들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답을 알려줄 책들을 찾아 책꽂이 사이를 산책했다. 어딘가에 답이 숨어 있고 그 답을 찾기만 하면 되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했다.



> 이제 그는 책 밖으로 나왔다


“이치조라는 녀석은 세상과 접촉할 때마다 안으로 똬리를 감는 성격이지.

그러니까 한 가지 자극을 받으면 그 자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회전하여

점점 깊고 촘촘하게 마음 깊숙이 파고 들어가지.

(중략) 세상에 단 한 가지라도 좋으니까 그의 마음을 훔칠 만한

훌륭한 사람이나 아름다운 사람이나 상냥한 사람을 찾아내야만 하는 거네.

한마디로 말하자면 더욱 변덕스러워져야만 한다네.”

(나쓰메 소세키의 <피안 지날 때까지>예옥, 2009, p275~276)


책 속에만 숨어 살던 그가, 지금은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를 세상 밖으로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더 이상 시작과 끝을 함께 안고 가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스스로에게 한계를 먼저 정하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머리의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들어주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책에게 답을 구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자신의 답을 찾기 위해, 아니 자신의 답을 '만들기' 위해 책 밖으로 나왔다. 무엇이 그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한 것일까.


“소리 없는 우아함.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 (중략) 인생을 결정하는 경험의 드라마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할 때가 많다. 이런 경험은 폭음이나 불꽃이나 화산 폭발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경험을 하는 당시에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빛과 멜로디를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이 아름다운 무음(無音)에 특별한 우아함이 있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들녘, 2007, p55)


그렇다. 어쩌면 그 자신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의 아름다운 무음의 이끌림이었을 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오랫동안 아주 조금씩 준비되어 온 내적 동요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제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답을 책에게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일 게다. 세상에 오로지 단 한 명뿐인 자신의 삶의 답을 자신이 아닌 그 무언가에게 알려달라고 조르지 않는다는 것일 게다.



> 그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그는 꿈이 생겼다. 삶의 시력을 높이고 싶다는 꿈이다. 글 속에서 그를 설레게 하는 문장을 줍듯, 삶 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그를 설레게 하고 감동하게 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내음을 줍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다.


그는 분명 언젠가 다시 글 속으로 돌아갈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닐 게다. 예전의 그처럼 글 속에 숨어 들어 가는 비겁함이 아닐 게다. 그가 만약 다시 글 속으로 돌아간다면, 삶 속에서 만난 따뜻한 무언가를 글이라는 이름으로 보관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가 만난 사람들을 그가 살던 집으로 초대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 그는 나무를 사랑한다


“나는 창문도 없는 버려진 집에서 우연히 자라게 된 나무 하나를 본 적이 있지.

그 나무는 빛을 찾아 나섰어. (중략) 이 나무는 장님으로 태어나서 한밤중에

자신의 강한 근육을 뻗어 이 벽, 저 벽을 더듬으며 비틀거렸어. 그러는 사이에

경험한 일들이 꼬여 있는 나뭇가지들에 새겨졌지. 그런 다음 나무는 태양 쪽으로

난 천창을 깨고 마치 주간(柱幹)처럼 곧게 솟아올랐지."

(생텍쥐페리의 <안녕 생텍쥐페리>(시아출판사, 2005, p192~193)


그는 나무를 사랑한다. 나무처럼 살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다. 삶의 시간마다 나이테가 새겨지듯 그는 자신만의 나이테를 그려나가기를 꿈 꾸고 있다. 그는 나무를 사랑하고 나무의 그늘을 사랑하고 나무의 강인함을 사랑하고 나무의 변함없음을 사랑하고 나무의 올곧음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예전처럼 나무를 알기 위해 책을 펼치지는 않는다. 그는 나무를 알기 위해 나무에게 다가가 가만히 나무 기둥을 안아 보고 하염없이 바라보며 나무가 들려주는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그는 나무를 사랑하는 법을 새로 배우고 있다. 삶을 사랑하고 책을 사랑하는 법도 다시 배우고 있다. 그렇게 그는 지금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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