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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Oct 17. 2020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

이 책의 서평을 쓰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다. 왜일까. 책이 어렵지도 않았고 두꺼운 것도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1시간 만에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그렇다고 대단히 획기적인 감동이나 깨달음을 주는 것 또한 아니다. 하지만 처음 이 책을 읽고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개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고 난 후에 정말 갖고 싶은 책만을 구입한다. 나의 짐이 느는 것, 소유물이 느는 것이 싫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용하지 않는 것이 내 곁에 있는 게 싫어서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고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보통은 한 번 읽고 서평을 쓰곤 하는 데, 이 책은 쓰지 못했다. 두 번 읽고 다시 정리한 구절을 곱씹고 그러고 나서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 중 하나는, 이 책의 중심 주제인 ‘내려놓기’에 대해 더 오랫동안, 더 깊이, 더 가까이에서 이해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싶다. 나의 마음이지만 내가 분명히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한 ‘내려놓는다’는 것이란 싸우고 발버둥치는 짓을 멈추고현실을 더 이상 부정하지 않는 법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는 법을 찾는 것(p4)"이라고. 저자에게 있어서, 내려놓는 법을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인생의 숙제였다. 누구나가 중요한 주제일지 모르지만 저자에게는 누구보다도 더 필요했다. 절실했다. 그는 선천적 뇌성마비로 세 살부터 17년간이나 요양시설에서 생활해야만 했고 매순간 자신의 장애, 결핍과 동거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려놓는다, 비운다는 것은 그리 특별한 주제는 아닐지 모른다. 언젠가부터 내가 찾고 있던 질문이자 배우고자 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게 언제부터인가 생각해보면, 어른이 되고부터인 듯하다. 자기계발서를 탐독하던 시기의 끝자락에서였던 것 같고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걸 시리게 알게 된 즈음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 이런 생각들은 저자만의 독특한 생각은 아니다. 이런 종류의 책을 처음 읽는 것도 아니다. 비슷한 책을 읽고 산 적도 있다.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다른 책들과 다른 무언가가 있었고 내가 알고 싶었던 무언가가 있었다. 듣고 싶었던 무언가가 있었고 희미한 숨막힘을 느꼈던 무언가가 해소되는 듯한 무언가가 있었다.


내려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저자의 정의를 통해 내 막연한 답답함의 정체가 비로소 명확해진 것 같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자포자기가 아니다. 포기나 단념도 아니다. 저자는 말한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그럼 저자가 말하는 ‘내려놓기’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이 책의 중심이자 내가 알고 싶은 그것이기도 하다.


이 ‘내려놓기’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집착하지 않기, 이완, 마음 다잡기’ 등의 용어들을 사용한다. 먼저, ‘집착이 없다’는 것을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무엇이든 확정하지 말되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는 자세 (p18)”라고 말이다예를 들어, “내 아내는 내 아내가 아니다바로 그래서 나는 이를 내 아내라고 부른다(p17)”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의 아내는 이러이러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꼬리표를 달지 않는다, 즉 규정짓지 않는다는 의미다. 저자는 또한 ‘내려놓는다’를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p116)”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내려놓는 삶의 태도란 어쩌면 자신의 나약함을 더 이상 물리쳐야 할 적으로 여기지 않는 자세를 말하는 건지도 모릅니다.(p39)”


자신의 약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것이란 의미다. 어쩔 수 없으니까, 아무런 기대도 희망도 품지 않겠다는 자포자기가 아니다. 치유가 꼭 아니더라도상처와 더불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닫는 일(p120)”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완’이라는 용어도 사용한다. 저자가 말하는 이완이란, 그것은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우리 자신의 참된 모습으로 변하는 것(p109)”이며, 자신의 진짜 얼굴과 대면하는 것자신의 진짜 본성을 발견하는 것(p110)”이다.


이 이완이라는 개념을 생각하며 문득 희망학교에 새로 들어온 한 아이가 떠올랐다. 새 학기가 되고 중학교 1학년 여자아이 한 명이 새로 들어왔다. 작년부터 함께 수업을 들은 아이들은 1년 동안 서로 친해져서 스스럼없이 서로 장난을 치고 선생님에게도 스스럼이 없다. 하지만 내가 그 아이를 처음 본 날은, 아이가 두 번째로 그곳에 온 날이었다. 유난히 시끌벅적했던 그 날의 분위기 탓에 그 아이는 더욱 고요하게 보였다. 보통 학원과 다른 곳이기에 조금 더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까 싶어 일부러 말을 걸기도 했다. 그 아이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나 자신도 낯선 곳에 가면 그 아이처럼 되기 때문에 어떤 순간의 ‘나’에 대한 말걸음일지도 모른다. 내가 받고 싶은 행동을 그 아이에게 하고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리라.


평소 집에서도 오늘처럼 얌전하냐고, 요란스럽게 장난치는 아이들을 보며 그 아이에게 물었다. 아니란다. 자기도 집에서는 저 아이들처럼 한단다. 그 말을 듣고, 조만간 저 아이들처럼 되겠구나, 그렇게 되면 좋겠네, 라고 생각했다. 버릇없어 진다는 게 아니다, 자신의 생각을 꺼려하지 않고 말할 수 있고 조금 아픈 곳일지라도 숨기거나 아닌 척하지 않고 바라보고 표현할 수 있는 아이가 되었으면 싶었다.


처음 우리 독서반 아이들이 자신들이 원치 않게 가질 수밖에 없던 상처에 대한 아픔을 외면했던 시기가 있었던 것처럼, 그러다 그 아픔조차, 처음 본 나와 같은 서투른 선생님에게도 마음을 열고 믿어주고 스스럼없이 대해주게 된 것처럼, 이 아이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저자가 말하는 이완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이완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소중한 사람과 있을 때, 상대가 이완될 수 있도록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고 한다. 참 예쁜 마음이다. 상대를 그대로 품어주고 싶다는 저자의 따뜻함이 전달된다.


일이 잘 안 풀릴 때우리는 뭔가를 닥치는 대로 바꾸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외모를 바꾸고화장을 고치고분위기를 전환해서 완전히 새 모습으로 탈바꿈합니다하지만 마음을 다잡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지속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어떻게 해서든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유지하면서 계속 전진하는 것이죠중요한 것은 지금 그렇게 내딛는 발걸음 자체입니다. (중략어떻게든 새로운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욕심 없이 말입니다.(p116~117)”


내려놓는 삶의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 저자가 사용하는 또 다른 표현으로, ‘마음을 다잡다’가 있다. 마음을 다잡는다고 하면 뭔가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고 변화시키는 듯한 느낌이 있다. 지금 이대로는 안 되겠다, 행동해야겠다, 그런 느낌이다.


실제로 나 자신은 그렇게 해 왔다. 지금 이대로는 아닌 것 같고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 때, 정말 단순하고 바보 같은 짓이지만 다이어트를 하든 헤어스타일을 바꾸든 무언가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바꾸고 싶었다. 바꾸곤 했다. 방의 배치나 물건 정리 같은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걸 나 스스로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할 수 있는 게 나에게 있다고, 결코 나는 무력하지 않다고, 나에게 말해 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그럴 때 일수록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계속해서 전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것이 마음을 다잡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나에게는 조금 의외에 가깝고 약간의 충격에 가까운 생각으로 읽힌 문장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말, 그것이 과연 도움이 되는 것일까, 란 의문도 들었다.


삶으로부터 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과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아무것도 없습니다.(p119)”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날 때부터 가진 장애, 그로 인해 17년간을 요양시설에서, 불구자로 살아온 그. 삶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다, 라는 이 말이, 이 문장이, 그 문장의 무게가 참 깊게 느껴진다.


저는 고통과 슬픔이 우리 안에 늘 자기 자리를 꿰차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중략아이들을 관찰하면서 제가 놀란 건그 아이들은 울 때 있는 대로 깡그리 울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그러고 나며 슬픔이 깨끗이 사라지죠유년기의 상처라는 것도뿌리째 살아내지 못한 아픔이 앙금으로 계속 남는 현상이 아닐까요.(p15)”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위로의 말은, ‘남들도 다 힘들어’라는 말이다. 나의 삶의 무게, 혹은 아주 작은 힘든 일일지라도 ‘남들도 다 힘들어’ 라는 말을 들으면 뭔가 기운이 빠진다. 내가 듣고 싶었던 것은, 남들도 나처럼 힘드니까 그들의 힘듦을 보며 나만이 아니었어, 라는 안심을 원했던 게 아니다. 남의 불행이 나에게 행복이나 위안, 안심이 되지 않는다. 나는 그저 ‘그랬구나, 힘들었겠구나, 슬펐겠네’라는 말이면 충분할 때가 많다.


삶이라는 상자 안에는 기쁨과 행복이라는 양(+)의 감정뿐만이 아니라 고통, 슬픔, 괴로움 등의 음(-)의 감정도 당연히 함께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그 음의 감정조차도 당연한 것이기에 피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모른 척 하고 싶지도 않다. 당연한 것이니까. 그렇기에 그것들을 충분히 내 안에서 받아들이고 싶다. 인정하고 싶다.


예전의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음의 감정들은 숨기고 가리고 모른 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에게 그랬기 때문에 상대의 음의 감정도 제대로 받아주지 못했다. 이 말은 규정짓는다는 의미의 ‘내려놓기’의 의미와도 다시 연결된다. 음의 감정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양의 감정인 나 자신만을 보고 싶다는 것이며 양의 감정, 상태인 자신을 하나의 이상적인 ‘나’로 규정하고 그 외의 ‘나’는 부정한다는 의미가 된다. 마찬가지로 타인에 대해서도, 내가 원하는 바람직한 친구, 아내, 혹은 동료, 상사, 부모의 모습을 정해 두고 그것과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참벗의 의미를 규정하는 데 집착해서는 안 되겠죠제 생각에 참벗이란 무엇보다 판단하지 않음으로 이루어지는 존재 같습니다. (중략삶이 제게 가져다준 참벗이 있다면바로 제 아내입니다제가 놀란 건그녀가 아무 판단도 내리지 않은 채저와 마찬가지로 힘은 없어도 제 곁을 지키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p25)”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청아출판사, 2012)에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세 가지 방식이 나온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그리고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p184)”


이 중 두 번째와 세 번째에 대한 부연설명으로 이런 구절이 덧붙여 있다.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두번째 방법은 어떤 것 -선이나 진리, 아름다움- 을 체험하는 것, 자연과 문화를 체험하거나(마지막이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하는 것, 즉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p184)”


선이나 진리, 아름다운 어떤 것을 체험하거나,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하는 것. 즉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삶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의 하나라고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책에서 말하고 있다.

서로 전혀 다른 내용이라 생각했던 두 책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 같다.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과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는 내려놓기의 삶의 태도. 전혀 연결고리가 없을 것만 같았던 두 책이 묘하게 이어지고 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결코 자포자기가 아니다. 희망을 포기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삶에서 욕망하지 말라는 것 또한 당연히 아니다. 저자는 스피노자의 말을 인용하며 적확한 욕망과 부적확한 욕망을 구분하라고 한다.


적확한 욕망이란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욕망으로바깥에서 흘러들어온 것과는 다릅니다우리가 눈여겨 살펴보아야 할 것은 바로 그런 욕망이겠죠.(p101)”


그리고 또한 저자는 이런 말도 한다. 욕망이란 현실에 다시 발붙이기 위한 도구일 수도 있는 겁니다불가능한 것이 아닌최선의 것을 욕망한다면요.(p105)”


몇 달 전, 우연히 들었던 라디오에서 너무나 마음에 드는 시를 만났다. 하지만 그 시를 언급한 출연자는 시의 정확한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고 나는 그 시를 찾을 수 없었다. 그 시가, 우연히 이 책 안에 인용되어 있었다. 나에게 오기로 약속된 것 마냥.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의 한 구절이다. 나의 올해 수첩의 가장 첫번째 장에 위치하고 있는 이 시는, 이 서평의 마지막으로 가장 잘 어울린다.


주여,

제가 변화시킬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와,

제가 변화시킬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과,

그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소서.(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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