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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사장 Jul 22. 2021

이 세상은 시뮬레이션인가

뼛속까지 공대생의 인문학 하기

 

 일론 머스크는 미국 한 방송에서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일 확률이 99.9999% 라고 미친 것 같은 소리를 했다. 그는 왜 이런 ‘일리 있는’ 미친 소리를 한 것일까?


 그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우선 과학기술이 지금의 속도로 발전할 경우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는 정말 인간이 사는 것과 거의 유사한 환경의 시뮬레이션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렇게 되면 그 시뮬레이션의 수는 현재 상용 게임처럼 하나가 아니라 수백수천 개까지 금세 늘어날 것이다.


 한편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거기까진 아니더라도 비슷한 정도의 지능을 가지는 날이 멀지 않았다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가까운 미래에 어떤 시뮬레이션 안에 존재하는 인공지능은 그 시뮬레이션이 시뮬레이션이라고 인지하지 못하고 존재할 것이다. 그 인공지능은 시뮬레이션 안에서 지금 우리가 그렇듯이 과학 기술을 발전시킬 것이고 그들도 그들의 환경과 비슷한 시뮬레이션을 만들 가능성이 크다. 이런 식으로 시뮬레이션이 시뮬레이션을 만들고 또 그 시뮬레이션이 시뮬레이션을 만들면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고 현실 세계는 단 하나만 존재할 것이다. 


 그럼 우리가 그 인공지능, 여기가 그 시뮬레이션이 아니라는 증거는 어디 있는가? 확률로만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시뮬레이션일 확률 = 1- (단 하나의 진짜 세계 / 전체 시뮬레이션의 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99.9999% 라는 결론이 나온다.


 

 어떤 증거도 없고 허무 맹랑한 얘기라고 치부하기에는 이상한 점이 너무 많다. 왜 하필 나는 인류의 700만 년 역사 중에 지금 태어나서 살고 있을까? 과거 인간의 무지하고 빈약했던 그 무수한 시간이 아니고 왜 지금인가?


 ‘호모 데우스’에서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 종은 앞으로 몇 백 년 안에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했다. 더 고등의 종이 되어 신처럼 영원히 존재하거나 인간이 만든 존재에 의해 멸종되거나 할 가능성이 크다고 나도 동의한다. 하필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가 곧 끝날지도 모르는 이 가장 번성한 시점에, 왜 이렇게 최적의 시점에 나는 호모 사피엔스로 존재할까? 아니 존재하긴 하는가?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우연이다.


 또 이 세상이 진짜라고 하기에는 과학이 발전하면서 속속들이 이상한 것들이 너무 많이 발견된다.


 양자역학에서는 관측자가 있고 없고 에 따라 다른 현상이 발생한다. 관측자가 자연현상에 개입한다는 것 자체가 시뮬레이션이란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치 우리가 게임상에서 앞쪽을 보고 있으면 뒤쪽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게임 속 뒤의 세계는 뒤를 도는 순간 창조된다.



 또 이 세상 모든 물체의 근본이 되는 원자는 그 부피에서 전자가 확률적으로 존재하는 전자구름의 부피를 제외하고 실제 질량을 가지는 양성자와 중성자의 부피만 보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지구의 부피를 전자구름의 부피를 빼고 뭉치면 농구공 하나 부피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사실들은 모든 것이 실체가 없다고 느낄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리고도 수많은 이상한 점들이 우리 앞에 있다. 이 세상의 실체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면 어디서 많이 들어봤거나 배웠거나 읽었던 것들이 생각난다. 바로 자아와 세계가 하나라는 일원론이다. 


 예로부터 동양의 철학과 종교는 대부분 일원론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세상은 내 안에서만 의미 있다는 것이다. 힌두교, 불교, 또 그 기원인 베다가 그러하고 도덕경의 도가가 그렇다. 또한 불교의 한 종파로 티베트 지역에서 발전한 밀교 (북방불교)는 이런 자아와 세계의 관계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있다. 이처럼 각각의 철학, 종교 등에서 이 일원론에 대해 표현하는 바는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모든 것은 내 안에서 일어난다는 가르침은 동일하다.


 이런 일원론을 맛보기로 이해하기 위해 매우 유명한 색에 대한 예를 들어보자. 내가 빨간색으로 보는 저 사과는 누구나 빨간색이라고 말한다. 근데 내 안에서 빨간색은 어떻게 인지되고 느껴지는지 그 실체에 대해 저 사람은 절대 알 수가 없다. 실제로 내가 느끼는 빨간색과 저 사람이 느끼는 빨간색이 동일한 것인지 절대 증명할 수 있는 길이 없다. 그저 우리는 다 같이 저 사과를 빨간색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빨간색을 봤을 때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저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난다고 누가 확신할 수 있는가?



 도대체 그럼 일원론과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라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일원론과 마찬가지로 시뮬레이션도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세상이 실체가 없는 시뮬레이션이라면 실제 빨간 사과는 없고 그 빨간 사과를 보는 느낌만을 받게 된다. 그럼 만약 이 세계가 실체가 있는 세계라고 했을 때 진짜 세계에서 내가 보는 빨간 사과의 느낌과 시뮬레이션 안에서의 느낌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실체라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내 답은 내가 사는 이곳이 시뮬레이션이던 현실 세계이던 모든 것은 결국 내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은 동양철학의 내가 세계이고 세계가 나라는 철학과 맞닿아있다. 기원전 1500년경부터(베다) 인간이 이런 고민을 해왔다는 것을 말해주고 그들의 위대한 지혜와 가르침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이 내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것인가? 


 위대한 옛 스승들은 인간의 모든 욕망과 그로 인한 고통이 다 내 안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고통스럽다. 어릴 때는 부모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고통스럽고 학업 등의 경쟁이 고통스럽다. 성인이 되어서는 먹고살기 위해 고단한 몸을 매일 일으키며 일 해야 하는 것이 고통스럽고 의미 없고 반복적인 일상을 왜 살아가야 하는지 고통스럽다. 남보다 더 가지지 못한 것이 괴로우며 그걸 채우려는 몸부림 자체가 또한 고통이 된다.


 하지만 이 모든 고통이 내 안에 있다. 이것을 안다고 매일 아침 몸을 일으키는 것이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일으킬 때 고통은 없어질 수 있다. 일 하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어렵겠지만 일하는 것의 고통은 없어질 수 있다. 계속 나보다 더 가진 사람이 많겠지만 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명심하자. 이 세상은 시뮬레이션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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