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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윤 Jun 24. 2022

초여름의 초록빛 확실한 행복_쇼비뇽 블랑

  드디어 시간의 도움으로 도착하고야 말았다. 초여름. 나에게 초여름은 연두의 들뜸이 농익은 초록으로 변해가는 녹색 계절의 성장기이다. 이 계절을 더욱 반갑게 맞이할 수 있는 완벽한 이유가 나에겐 있다. 나에게 연두의 맑은 바람에 초록이 살짝 뭍은 훈풍이 섞여 불어오는 오후가 왔다는 것은 쇼비뇽 블랑의 계절이 왔다는 뜻이다.      



  “이 와인은 정말 맛있게 먹었어요.”

  몇 해 전 초여름, 와인샵 점원분은 특유의 느린 목소리에 확신을 담아 와인 2병을 추천해주셨다. 평소 가끔 들르던 와인샵인 덕에 점원분은 평소 내가 선호하는 와인 스타일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계시는 분이었다. 와인을 즐겨 마시지만 아직은 품종과 품종 간 배합, 섬세한 맛의 구분에 있어 늘 와인 초심자인 나는 초심자의 특권인 조언 듣기에 아주 순응적인 편이다. 심지어 때론 병 라벨이 예뻐서 와인을 고르기도 하는 내가 “이 와인 어때요?”하고 물으면 점원분께서는 “이 와인도 좋은데, 저는 이 가격대이면 이 와인이 괜찮더라고요.”하고 추천을 해주시곤 하셨다. 그럴 때면 늘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그 점원분은 그 많은 와인을 다 드셔 보시는 건가...?’ 그리곤 마지막엔

  ‘부럽다...! 덕업 일치의 삶!’     


     

  믿고 구매하는 점원분의 추천을 받은 와인을 집에서 따서 잠깐의 브리딩을 거쳐 한 잔 마시면, 늘 만족스러운 자줏빛 한 모금이 입안에 그윽하게 번졌다. 맑은 자줏빛 한 모금이 들어온 순간 까슬까슬하고 빽빽하던 일상이 느슨하게 풀어진다. 단비가 사뿐히 내린 숲의 흙이 촉촉하고 보드라워지며 숲의 풀과 흙의 푸른 향이 숲에 울려 퍼지듯, 하루 내내 플랫하고 건조했던 내 마음도 수분감을 머금으며 너그러워진다. 그리고 플루티하면서도 크리미한 질감의 향이 나와 함께 와인을 마시는 사람 사이에 피워진다. 그렇게 와인은 뾰족한 일의 세상을 분리시켜 감미로운 나른함의 세상으로 데려간다. 와인은 나를 여유 있고, 미소 짓는 사람이 되게 해주는 힘이 있었다.


          

  이번엔 쇼비뇽 블랑 종의 화이트 와인이었다. 신혼여행으로 니스에 도착해서 처음 먹었던 음식은 굴에 샤블리였다. 샤블리. 이름도 사랑스러워라! 그리고 처음 파리 여행을 갔을 , 가장 기억에 남는 와인도 알리고떼 품종의 화이트 와인이었다. 겨울 니스의 샤블리는 신혼여행으로 긴장된 마음을 풀어주었고, 여름 파리의 알리고떼는 무더위와 습도를 칠링해주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그때부터 내게 화이트 와인은 가벼운 과일의 향과 시트러스 향으로 산뜻한 시원함과 경쾌함의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이렇게 반가운 화이트 와인인 데다 내가 좋아하는 시트러스 향이 가득한 와인이라고 하니 이번에도 역시나 덥석 집었다. (참고로,  데일리 와인을 주로 구매하는 나의 패턴을 알기에, 점원 분도 그렇게 비싼 와인을 추천하여 나를 놀라게 하진 않으신다. 점원 분과  사이엔 와인  병의 가격 허들이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다.)     



  화이트 와인이니 집에 돌아와 회를 주문했다. 하필 늘 주문하던 집 앞 횟집이 잠시 영업을 중단해서 새로운 곳을 찾아야 했다. 어차피 새로운 곳이니, 숙성회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이윽고 도착한 숙성회는 뚜껑을 열자마자 온갖 예쁜 색들과 형태들이 모두 내 눈으로 달려들었다. 연주황의 연어, 선홍빛 참치, 투명한 하얀색인 광어, 분홍빛 새우, 주황빛 우니는 매끈한 윤기가 잔잔히 머금어져 있었다. 그리고 푸릇한 무순과 노랑 레몬, 연둣빛 생고추냉이는 색과 필요를 더했다. 그렇게 한 박스 안에는 개별이 아름답고 수분기를 은은히 머금은 생기 있는 꽃밭이 담겨있었다.


          

  쇼비뇽 블랑을 칠링 하기 위해 칠링 바스켓에 얼음을 붓고, 쇼비뇽 블랑을 넣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숙성회의 품격을 위해 회에 어울리는 접시에 하나하나 옮겨 담았다. 행여 요리사분께서 예쁘게 담아주신 모양이 흐트러질까 집중하고 또 집중하며 담았다. 잔과 회를 세팅했으니 이제 마음껏 즐길 시간. 칠링 한 와인을 잔에 따랐다. 투명하던 보통의 와인 잔 표면이 차가운 와인으로 아주 작은 물방울들이 맺혀 습기가 되었다. 이제 내 마음도 수분감으로 가볍고 시원하며 향긋해질 차례다.  


         

  와! 시트러스의 설익은 연둣빛과 레몬의 쨍한 노랑이 찌릿할 때쯤 초록사과와 멜론의 너그러운 초록의 단 맛이 가볍게 감싸 안아준다. 그리고 청량한 미네랄과 스톤 향으로 세련된 맛을 더하고 마지막엔 가벼운 달달함이 톡 한 방울 스친다. 이 밸런스! 쇼비뇽 블랑 한 잔에 내가 그려온 새초롬한 연둣빛에서 농익은 초록으로 가는 여정인 초여름이 담겨있었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초여름의 쇼비뇽 블랑을 사랑하게 되었다.  


         

  남편과, 좋아하는 사람들과 와인을 마실 때 늘 쇼비뇽 블랑을 리스트업 했다. 숙성회와 마시기도 했고, 부라타 치즈에 샤인 머스켓이나 샐러리, 루꼴라를 넣고 올리브 바질 오일과 화이트 발사믹, 소금 톡톡 샐러드를 만들어 마시기도 했다. 장소는 주로 우리 집 거실 블랙 테이블이었고, 가끔 야외 캠핑장이기도 했다. 특히 야외에서 와인을 마실 수 있다면 언제나 나는 쇼비뇽 블랑을 챙겼다. 숲의 초록이 내 안에도 들어오는 기분은 쇼비뇽 블랑뿐이었다.


           

  올봄부터 와인샵에 가면 언제나 쇼비뇽 블랑의 안부를 묻는다. 즐겨마시던 쇼비뇽 블랑은 지금 입고가 되었는지, 그리고 또 새로운 쇼비뇽 블랑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기존에 마시던 쇼비뇽 블랑은 그 훌륭함을 알기에 구입할 때부터 기분이 좋다. 또 새로운 쇼비뇽 블랑은 어떤 맛일지 구입할 때부터 기대가 된다.


          

  그리고 집의 냉장고 한편에 좋아서 찾아마시는 쇼비뇽 블랑과 새로운 도전인 쇼비뇽 블랑을 넣어둔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언제 마시지. 그 생각을 할 때마다 기분이 좋다. 저 와인을 따는 테이블에서 내가 얼마나 기분 좋을지 나는 확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록의 계절이 초록의 계절이 되어가는 초여름부터 여름 동안 내게 확실한 행복은 쇼비뇽 블랑 한 잔이다. 나를 쌉싸름한 초록 여름이 되게 해주는 칠링 된 쇼비뇽 블랑의 연한 황금빛 한 잔이 있어 이 계절의 성급한 더위와도 싱그러운 초록빛 화해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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