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 오키프(1887-1986)는 독립적이면서도 의존적인 여성이다. 모든 여인(이 곳에서는 사람이 아닌 여인으로 한정 짓고자 한다)에게 이 두 가지의 감정은 공존한다. 다만 둘 중 한 감정의 비중이 더 높고 낮거나, 혹은 균형을 이룰 뿐 모두에게 이 감정은 공존한다. 조지아 오키프의 독립성과 의존성은 아마 각각 정확히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던듯하다. 젊은 시절 조지아 오키프가 많은 남성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끊을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상대방의 반응이 있었다. 그들은 그녀의 차분하고 지적인 아름다움에 이끌렸다가 그녀의 솔직하면서도 격정적인 감정을 떠안지 못했다. 그 누구보다 지적인 생명체였던 조지아 오키프가 이런 상대의 반응을 알아차리지 못할리가 없다. 그녀는 그래서 자신의 감정이 격해지기 전에 그녀는 스스로 상대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조지아 오키프의 모든 행동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것들이라 하지만 어쩌면 그건 본인만의 방식이지 정답은 아니엇을 것이다. 조지아 오키프는 스스로가 규정한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그것이 남의 눈에 비추어지는 외적인 모습이든, 아니면 스스로가 세운 엄격한 기준이든 그녀는 도달해야 하는 자아의 목표가 있었다.
그녀가 스티글리츠라는 사람을 인생의 연인으로 선택하게 된 과정도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를 제외하고 모든 인간관계는 내 선택의 결과이다. 만약 오키프가 사진작가 스트랜들을 선택했다면 그녀의 인생과 작품은 달라졌을 것이고 아마 대중은 그 작품을 다르게 평가했을 것이다. 작가에게 작품은 솔직한 자신이기도 하지만 대중이 바라보는 작가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이 아르누보적인 과감한 자연물의 조형화로 간주되기 보다는 은밀한 여성의 신체라고 머리에 순식간에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아마도 스티글리츠의 정부로 살아온 세월이 모두의 뇌리에 박혀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그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작품을 바꾸는 것도 우습고, 그것과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보이려는 것도 우습다.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려면 내 스스로가 다른 선택을 하면서 다른 방향으로 인생의 키를 돌려야한다.
하지만 인간은 방향전환에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마음은 자유를 얻지 못한다. 극기를 하려면 다른 선택을 해야하며 그 선택은 통증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신체의 자유를 상실한 통증, 혹은 마음의 끌림을 외면한 통증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대가를 치룬만큼 극기에 성공한다면 결국 자유는 우리의 것이다.
나는 작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떤 작업을 해야할까 많은 고민을 한다. 조지아 오키프는 굉장히 나와 닮은 면을 갖고 있어서 나는 그녀에게 깊숙히 침투하여 그녀의 인생과 선택을 내 것으로 돌려본다. 가정환경, 태어난 시대, 주변환경 모든 것이 다르지만 나는 그녀의 영혼을 그 자체로 순수하게 느끼고 사랑하며 애도하고 있다. 어짜피 여자는 늙어간다. 아름다움도 지적인 생동감도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아름다움이 나에게 깃들어있는 순간만큼은 이 순간이 영원할 것 같다. 그리고 그 순간에 한 선택들도 영원히 나를 지켜줄 것 같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가는 것을 목도하기 전 나는 둘 중 한가지를 해내야 한다. 그 순간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미리 준비를 하던가, 혹은 그 순간이 왔을 때 상처받지 않도록 강인해지거나 우리는 둘 중 한가지를 미리 해야한다.
한 시대에서 여성과 남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분류인가? 내가 여성으로 태어나 여자로 살아가면서 온전히 이 삶에 대한 대우와 과정을 겪어가지만 나는 남자의 것들은 알지 못한다. 아는 것을 그려가는 과정에서 창작은 피어나고 감정은 점점 고무된다.
나는 여자의 감정과 인생을 내 작품에 담아내는 것에 대해 고민한다. 나와 같은 여성이라면 나와 함께 같은 고민에 참여해보고 같은 마음을 나누었으면 좋겠고, 나와 다른 남성이라면 우리의 이야기와 느낌을 한번쯤 가볍게 들어봐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