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려고 하면 할수록 힘든 것. 참다가 쌓이면 부패하고 썩은 냄새를 풍귀는 것. 오늘도 방귀를 참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냄새가 날까 봐 소리가 창피해서 부끄러운 사람이 될까 봐 생체 흐름을 거부하고 밖으로 쏟아내지 못한다. 자연의 섭리를 거부하면 발생될 수 있는 어마무시한 일들, 의학적으로는 장팽창에 의한 복통 및 실신에 이르기까지 발생할 수 있다.
갑자기 왜 방귀 타령일까. 고전 그림책 <방귀쟁이 며느리>를 [말을 글로 만드는 시간] 에세이 수업에서 소개받은 후부터 그다지 깨끗한 어감을 주지 못하는 방귀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림책이 주는 가시적인 효과 때문이었을까. 피부가 희고 어여뻤던 여인이 시댁에서 방귀를 뀌지 못해 얼굴이 누렇게 뜨고 폭삭 늙어 버린 형태에 생리적 현상을 참았을 때 오는 고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여러분이 참고 있던 건 무엇인가요?" 강사님이 질문했다.
방귀 뀌는 며느리가 참지 못하고 있는 얼굴이 노랗게 뜬 것을 보고 웃고 만 있었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글쎄. 내가 참고 있는 게 있을까? 혹은 결혼 전 후로 달라진 삶에서 어떤 것을 참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는 것은 나를 온전히 돌볼 수 없는 상태로 만든다. 자의에 의해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육아를 하며 시간에 쫏기는 현재를 바라볼 때 알게 모르게 참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글도 쓰고 싶고 그림도 그리고 싶고 책도 보고 싶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난 후에 하면 되지 왜 못하냐고 물을 수 있겠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는 한정적이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총량이 다르다. 저질 체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두 가지 모두 하라는 건 육아를 포기하라는 말이다. 오전에 가볍게 등교 문제로 워밍업을 한 뒤 오후에 벌어질 숙제와의 씨름을 하려면 체력을 비축해 놓지 않으면 안 된다.
작년까지는 살림을 미뤄두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나를 찾는 시간을 가졌다. 글에 토해 내지 않으면 뀌지 못한 방귀를 쌓아두고 있는 것 같아서 병이 들 것 같았다. 별 것 아닌 것을 쓰고 기억에 남기고 싶은 것들을 쓰다 보면 글의 완성도보다 타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주는 명쾌함과 하나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에서 '뻥'하고 방귀를 뀐 듯 희열감이 느껴졌다.
아이들이 크고 살림을 미루면서 벌어지는 후폭풍이 커지다 보니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사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거지는 조금 이따 하고 글을 쓰고 싶다'라는 작은 욕망을 내보지 못하고 손에 고무장갑을 끼었다. 거품이 묻은 그릇을 씻으면서 하고 싶었던 말도 글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들까지 흘려보냈다. 씻은 물은 흘러갔는데, 쓰고자 하는 마음은 배수구망에 걸려 차곡히 쌓여갔다.
<방귀쟁이 며느리>의 방귀가 재능이었다는 걸 아는가? 파괴력 있는 방귀를 아무렇게나 쓰지 않고 적재적소에 활용하면 높은 곳에 있는 배를 딸 수 있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 글쎄. 나에게 글쓰기가 재능일까 의문이 들지만 적어도 정신과에 쏟아부어야 할 돈을 줄여준다는 의미에서 내 삶에 꼭 필요한 처방전이다.
어릴 적 아버지는 절대 방귀를 참지 말라고 하셨다.
"참으면 병 되는 거야"
그래서인지 우리 집에서는 아침을 먹다가 방귀를 뀌어도 박수세례를 받곤 했다.
참지 말자. 육아와 살림을 핑계 삼아 혹은 나는 한 번에 두 가지를 할 수 없는 저용량 에너지 인간이란 방패에도 숨지 말자. 적재적소에 방귀를 뀌듯 삶의 균형을 맞춰 에너지를 쓴다면 하고 싶은 글쓰기를 아름답게 꽃 피워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림책으로 생각에 의미를 더해 삶을 개선시킬 수 있게 도와주신 [말을 글로 만드는 시간] 에세이 강사 조미선 님(블로그 활동명 : 자아탐험가)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