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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난 백점이야.

받아쓰기 70점 받은 날

by 빈틈


받아쓰기 공책을 떡 하니 식탁에 펼친 딸.

백점이라도 받았나 싶어서 보니

90점도 80점도 아닌 70점.

라떼는 말이야, 이 점수 내밀지도 못했다.

좋은 소리가 나갈 것 같지 않아 애써 모른 척 중인데

느닷없이 딸아이가 먼저 선수 친다.


"엄마, 나 받아쓰기 백점이야!"




12월이 되면서부터 아이와 영어단어 받아쓰기 중이다.

한글도 못하는데 무슨 영어냐 하겠지만

초등 3학년부터 영어라는 과목을 배우니

국어를 처음 배울 때 간단한 문장을 받아쓰기하며

맞춤법을 익혀갔던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기본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마다 받아들이는 속도가 다르다는 걸 익히 알지만

그것이 누나와 동생의 관계가 됐을 땐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원래가 "삶은 무대포"라는 자세를 몸소 실천하는

막내의 경우 틀리든 말든 받아쓰기를 해온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간단한 영어단어는

곧잘 받아쓸 수 있게 되었다.


반면 첫째는 엄마와 무엇이든 시행착오를 겪는 아이.

영어 받아쓰기 하면 꼭 모녀 사이에 금이 갔다.

게 아닌가 싶어 지레 겁을 먹고 중단.

그러다 방학을 기점으로 다시 받아쓰기를 시작했다.

동생이 겪어온 오답행진을 이제야 시작하려니

나도 첫째도 인상이 구겨질 수밖에 없다.

최대한 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티를 안 내려야 안 낼 수 없었다.



그런데 아이가 70점 받아쓰기 공책을 내밀며

자기는 100점이라는 것이다.

이게 말이야, 방귀야.


"엄마,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지금 점수에 실망하지 않아도 된데.

왜냐하면 내 안에 잠재력은 무조건 100점이래.

그래서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간 100점 받을 거래!"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지만

마법의 공감 한 마디, "그랬구나"를 겨우 뱉어내고

부엌으로 몸을 피했다.

아이가 숙제를 하는 사이

그래도 내 자식인데 뭐라도 먹여야지 싶어

토마토를 데치기 시작했다.

먼저 껍질이 벗겨지는 것부터 하나씩 건져 올리다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뜨거운 물에 데치려고 넣은 토마토들도

자기만의 속도로 껍질이 벗겨지기 시작하는데

사람이라고 다를 것이 있을까.


아이도 자기 안의 잠재력을 믿는 만큼

사람마다 꽃피우는 속도가 다르다는 걸 아는 만큼

공부에는 왕도가 없음을 깨달은 만큼

그저 아이와 함께 묵묵히 이 길을 걸어가련다.




딸아, 너는 이미 나에게 100점야.

그러니 뭘 해도 또 100점 받을 수 있어!

그래, 너 잘났다! 파이팅 내 딸!




사진출처 : 픽사베이 무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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