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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 오른손

오른팔 깁스 이후

by 빈틈


"엄마~~ 나 오른손이 필요해~~~"


부엌에서 설거지하는데 또 딸의 호출이다.


"그래, 간다, 가.

자, 연필 쥐었어. 불러줘, 받아쓰게."




오른팔 깁스를 한 딸의 요즘을 대변하라면

딱 이 한 마디면 충분하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하게 하라."


오른손으로 하던 모든 일,

이를테면 밥을 먹고 이를 닦고 옷을 입고

심지어 글을 쓰고 그림 그리는 것까지.

오른손잡이가 오른손으로 익숙하게 하던 일들을

이제 모두 왼손이 도맡아 하게 되었다.


학기가 끝나갈 무렵 얼음 위를 헛디뎌

미끄러지는 바람에 넘어지면서 팔이 부러졌다.

평소 활달하기로는 막내가 둘째가라면 서러운데

첫째는 쇄골뼈부터 시작해 팔까지

오른쪽 깁스만 벌써 두 번째다.

얼마나 억울할까.


아,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1학년 여름.

지금은 3학년 겨울.

즉, 학업적으로 바삐 움직이기 시작할 즈음인

요즘과 비교하면 그땐 참 여유가 있었다.

학교수업, 받아쓰기 시험, 피아노 대회 등

모든 것이 중단되었다.


망연자실해서 울상이 된 딸을 보았다.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신세한탄을 했다.

많이 속상하겠다고 위로해줘야 했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 없음을 한탄하기는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건강을 잃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맞는 잔소리하는 꼰대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독해지기로 했다.



"왼손으로 해."


물론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잘 알았다.


'엄마도 못하면서...'


아마 아이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아이의 오른손을 자처했다.

아이의 숙제를 내가 대신 받아써주었다.

심지어 수학문제를 풀 때도

아이가 불러주는 식과 계산 과정을 그대로 적어갔다.

글쓰기 숙제를 할 때면 팔이 빠질 것 같았다.

피아노는 당분간 왼손연습만 진행하기로 했다.

숙제의 완성도, 수학문제집 진도, 대회 참가여부

이런 것들은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가 우울감에서 벗어나 뭐라도 할 수 있도록

그래서 지금까지 해오던 것을 가늘게라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그리고 드디어 내일

깁스를 풀지 1주만 더 할지 진료를 보러 가는 날이다.


"엄마, 내일 병원 갔는데 뼈가 덜 붙었으면 어쩌지?"

"그래봤자 1주 정도 더 할 거야.

저번주에 병원 갔을 때 잘 붙고 있다고 하셨으니까

너무 걱정 마."

"그래도 왼손글씨가 이제 좀 익숙해졌는데 아깝다."

"왼손도 쓰다 보니 익숙해지지?

사고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어.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야!

그 능력은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니야.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것을 붙들고 슬퍼하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뭐라도 해보는 것

거기서부터 이미 해결되고 있는 거지."

"근데 엄마, 나 아까운 게 하나 더 있어.

엄마가 씻겨주고 옷 입혀 주는 것 너~~ 무 좋았는데

이제 또 스스로 다 해야 해..."


이제 엄마 좀 그만 부려먹자고 툭 던졌지만

오랜만에 머리를 감겨주고 몸을 씻겨주는 일이

너무 싫지만은 않았다는 것까지는 말을 아꼈다.

늘 아이의 오른손이 돼주고픈 마음을 들킬까 봐.

그것이 아이의 독립에 방해가 될까 봐.



병원 가기 전에 한 번만 더 씻겨줘야겠다.



사진출처 : 픽사베이 무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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