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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무조건 사랑한다
눈이 오면 쓰레기를 버려야지
나가고 싶어서
by
빈틈
Jan 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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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밖에 눈 많이 와!"
(10분 뒤)
"엄마 쓰레기 좀 버리고 올게."
최근 2년 내가 사는 곳은 유독 눈을 보기 어려웠다.
오죽하면 이번 겨울,
그러니까 작년 12월이 되자마자 가족여행으로 간 곳이
다름 아닌 일본 북해도, 그리고 강원도 스키장이다.
두 군데 모두 눈 보러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곳이다.
그런데 이번주 시작부터 모습을 드러내던 눈이
오늘은 더 오래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들 방학을 맞아 집에만 있다 보니
날씨 예보를 확인하지 않은 탓에
하얀 눈이 더욱 반가웠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쌓이는 건 무리겠지.
웬만큼 추운 날씨가 아니면 적설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검정 아스팔트와 붉은 블록은
어느새 그 경계가 무색하게 하얗게 물들어갔다.
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아이들을 데리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행여 넘어질까 손 붙잡고 걷는 것도
집에 들어가자, 더 놀겠다 실랑이하는 것도
조용조용 가만히 내려앉는 눈과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 겨울에 못내 나갈 일은 쓰레기 비우는 일뿐.
급히 저녁 식재료를 다듬기 시작했다.
마침 야채비빔밥을 할 예정이었다.
냉장고 자투리 채소 껍질을 까고 먹기 좋게 썰었다.
행여 눈이 그칠 새라 손놀림은 빨라졌다.
꽉 찬 음식쓰레기와 분리쓰레기를 양손 가득 들고
아이들을 향해 외쳤다.
"엄마, 쓰레기 버리고 올게!"
엘리베이터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창 밖을 바라봤다.
이 풍경을 보고 어찌 나가지 않을 수 있을까.
급히 나오느라 미쳐 외투를 입지 못했
다
.
하지만 머리 위로 소복이 내려앉는 눈을
굳이 마다하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잔뜩 움츠러들어
분리수거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면
오늘은 아무도 밟지 않은 곳을 골라
한 발 한 발 발자국을 찍었다.
하얀 눈 밭에 내 발자국만 찍힌 그
희열에 비하면
쓰레기를 비울 때 후련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쓰레기장으로 가는 길이 이리 설렐 일인가.
어른이 되면 눈이 성가시다던데
나는 아직 이리 설
렌
다.
아니면 아직 철이 덜 들었던가.
사진출처 : 픽사베이 무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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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쓰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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