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에 대고 소원을 빌었다
달을 보면 우린 항상 손을 모았다.
그리고 소원을 빌었다.
식상하지만 고전적인 이것은
곧 우리 집 대보름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번 정월대보름날 눈소식을 듣고
소원을 빌기는 글렀다 단정했다.
'보름달은 오늘이 아니어도 볼 수 있으니까.'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마트로 나섰다.
옛날에는 설과 추석만큼
큰 명절에 속했다는 정월대보름.
이제는 그 모습을 찾기 어렵지만
그래도 달력에 찍혀서 나오는 날은
작게나마 챙기려고 한다.
그것이 우리 가족에게는
아니, 적어도 나에게는
일상에서 찾는 소소한 이벤트랄까?
꽤 큰 눈송이가 거침없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운전대를 꽉 움켜쥐고 브레이크를 잡아가며
굳이 마트로 향했다.
역시 대보름 음식인 오곡세트와 나물반찬을
알차게 구성한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덥석 집어 사고 싶었지만
4인 식구가 먹기에는 양이 차고 넘쳤다.
콩이 들어간 밥, 나물 반찬...
아이들이 좋아해 주면 모를까,
금방 쉬어버리기도 하는 음식을
많이 사기에는 부담이 되었다.
아쉬운 대로 곤드레 나물밥과 부럼세트를 샀다.
땅콩과 호두로 구성된 부럼세트는
호두가 한두 개 더 많이 들어간 것을 골랐다.
작년에 호두를 직접 망치로 깨어보는 일이
아이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옆에서 보는 나는 꽤나 마음을 졸였지만.
이제 동글고 노란 달만 뜨면 완벽한데.
대보름 음식을 먹고 밤산책을 하며
달님에게 소원을 비는 것이
우리 집 나름의 보름날 문화이다.
달은 뜨지 않지만 그래도 음식으로나마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거라 나를 다독였다.
어쩌면 먹는 즐거움이 그 아쉬움마저
먹어 없앨 수 있지 않을까.
곤드레 나물밥에 간장을 얹어 슥슥 비비고
김치를 척 얹어서 먹는 아이들 모습이
어쩐지 어색하면서 기특했다.
너희가 먹는 밥과 내가 먹는 밥이 다르지 않구나.
고춧가루 잔뜩 뿌린 어른밥상과
간장으로 조린 아이밥상을 따로 차린 모습을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제는 아이들과 밥상머리에 나란히 앉아 밥을 먹을 때면
미숙한 아이가 아닌 어엿한 어른으로 성장할
온전한 사람으로 보인다.
(남매간 젓가락 칼싸움이 일어날 때 빼고.)
밥상을 물리고 이제 부럼 깨기 시간.
"오늘은 눈이 많이 오고 흐려서 달이 뜨기 힘들데.
대신 우리 호두에 소원을 빌면 어때?"
둥그런 호두에 대고 소원을 빌자.
그리고 망치로 깨어보자!
불현듯 내 머리를 스치고 간 생각.
창의력이 이런 건가 싶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엄마 어깨에 힘을 실어주는 순간이었다.
그 옛날 제비가 물어온 박 씨가 터지면서
흥부의 소원이 이루어지듯
내 소원을 머금은 호두가 부서지는 순간
소원이 이루어지는 상상만으로 즐거우니까.
상심하기보다 대안을 찾자 했다.
뭐가 됐든 망치로 이 단단한 것을 깨부술 수만 있다면
아이들은 뭐든지 "오케이!" 외칠 기세였다.
식구수 대로 사온 호두를 자기들끼리
두 개씩 갈라서 차례로 깨부쉈다.
호두가 떫어서 맛이 없다는 볼멘소리에
호두 속살이 뇌를 닮지 않았냐,
이걸 먹으면 똑똑해진다는 뜻이니 하나라도 먹어라.
매년 오가는 대화를 처음 하듯 나누었다.
하지만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는
아무도 묻거나 말하지 않았다.
그것마저 우리들의 식상한 문화 중 하나였다.
어느덧 밤 9시가 훌쩍 넘은 시간.
각자 방으로 자러 갔는데
갑자기 딸아이가 긴급 호출을 했다.
"엄마!!!!!!!!! 엄마!!!!!!!!!!!!
빨리빨리!!!! 창문 봐봐!!!!!!"
저렇게까지 소리를 지르는 것은 필시
어마무시한 일이 벌어진 것이리라.
둘째와 나는 빠르게 딸아이 방으로 갔다.
아이는 손가락으로 창 밖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엄마, 달 떴어!"
거짓말처럼 하늘을 빼곡히 매운 눈구름은 온데간데없고
달 하나만 덩그러니 하늘에서 빛나고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읽던 <달님 안녕>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구름 아저씨 비키세요.
달님이 안보이잖아요.
그렇게 쫓아낸 구름 뒤로
달님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엄마와 아이가 손잡고 바라보는 장면.
책의 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하지만 또 한편 현실의 엄마는 좀 냉정했다.
'난 또 뭐라고.'
아이에게 별 탈이 없음을 확인한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는 곧 약속이라도 한 듯
달을 향해 손을 모았다.
호두를 향해 빌었던 소원과 같은 건지
다른 건지는 알 수 없다.
우리 가족의 안녕과 건승은 내가 빌면 되었다.
너희는 너희만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빌거라.
달님, 제 소원도 소원이지만
아이들 소원은 꼭 들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