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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쥐, 시골로 가다

구례, 봄 1

by 빈틈


손바닥만 한 시골집으로 이사 가는데 큰돈을 들이기는 싫었다. 짧게는 1년, 길어도 2년의 삶을 기약하고 가는 길이라 최대한 간소하게 챙겨 가고 싶었다. 아니, 그렇게 해야 만 했다. 이사 전 청소를 위해 한두 번 오갔던 그 집은 매우 작았다. 아파트에 살던 우리 가족도 4인 가족치고 그리 넓은 집에 사는 편에 속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농촌유학을 위해 오게 된 이 집은 "매우"라는 단어도 모자랄 만큼 작디작았다. 성인 남자 둘이 누우면 꽉 차는 거실 겸 부엌에 자그마한 안방이 딸린 것이 다였다. 수납공간은 없었다. 그저 이 시골에 나와 아이들 몸 누일 곳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거기다 더 큰 문제는 길이 좁아 이사를 위한 용달차가 들어가지도 못할뿐더러 집도 비탈길에 위치하고 있어 짐을 옮기기도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방법은 알아서 챙기고 옮기는 것뿐이었다. '필요한 것만 부지런히 이사박스에 챙겨서 한 두 번만 오가면 되겠지.'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무지함에서 비롯된 큰 착각이라는 것을 다행히 일찍 깨달았다. 지방의 소도시도 "도시"라는 제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아무리 버리고 줄여도 결혼 후 10년의 세월을 나름 윤택하게 누려온 티는 벗을 수 없었다. 신혼여행을 위해 샀던 DSLR 카메라는 유행이 지난 지 한참이지만 버리기에는 너무도 멀쩡했다. 아이들이 만든 도자기 그릇을 붙들고 쓰레기 봉지 앞에서 한참 고민했다. 필요 이상으로 쌓인 문구류, 거기다 컵은 언제 어디서 이렇게 많이 받은 건지 알 길이 없다. 결국 아이들을 불러 앉혀놓고 검은 비닐봉지를 하나씩 손에 쥐어 주었다.

"방에 가서 너희 물건을 최소한만 남기고 나머지는 엄마가 주는 봉지에 버려."

아이들은 불만 섞인 목소리로 항의했다. 하지만 그 좁은 집에 이 많은 물건이 다 들어갈 수 없음을, 인간의 삶에 꼭 필요한 의식주에 자그마한 장난감들과 잡동사니가 낄 틈이 없다는 것을 일장 연설로 상기시켜 주었다. 나의 논리 정연함을 아이들은 "또 잔소리"라 칭했다. 아이들이 뒤돌아 방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나는 곧장 내 드레스룸으로 숨어 들어갔다. 짐 싸다가 벌어진 오늘의 멘(탈) 붕(괴) 사태가 아이들이 아닌 나의 물건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쥐어준 것보다 더 큰 비닐봉지를 들고 안 입는 옷들을 주섬주섬 담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드레스룸으로 들어오기 전에 모든 정리가 끝나야 했다. 안 그러면 아이들도 자신이 가진 장난감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을 눈치챌지 모를 일이었다. 거기다 자신의 물건들을 다 가지고 가겠노라 선전포고까지 하는 날에는 아까의 일장연설도 무용지물이 되어 버릴 터였다.


긴 겨울방학을 아이들의 삼시 세 끼를 챙기며 무심히 보내다 손 없는 날 중 이삿날로 점찍어둔 날 일주일 전부터 빈 상자를 바쁘게 채워갔다. 하나의 상자를 채우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준비해 둔 상자는 다 찼지만 집에 있는 짐은 절반도 채 비워내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많은 물건이 그 집에 들어갈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없이 살 수도 없는 살림들이었다. 조그마한 집구석에서 어디든 물건을 쑤셔 넣으며 정리하고 있을 미래의 나를 믿으며 그렇게 하나 둘 꽉 찬 상자의 수를 늘려갔다. 자차로 한 두 번만 움직이면 될 것 같았던 이사는 결국 온 친정식구가 합세하여 3번을 오가고 나서야 마무리되었다. 내가 벌린 일에 따라온 식구수만큼 이사는 정신없지만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고 그것과 비례하여 그날의 짜장면 또한 맛있었다.


결혼 후 맞벌이 부부가 되어 친정과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던 10년의 세월에 안녕을 고했다. 친정 부모님과 동생이 돌아가고 남은 자리, 그곳이 나의 새 보금자리가 되었다. 진정한 "독립"이 시작된 날. 먼 훗날 이날을 돌아보면 내 인생의 "광복"이 시작되는 날이기를 바라며 이불속으로 폭 고개를 넣었다.



아참, 아까 마무리되었다던 그 이사에 대해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사실 이사만 끝났을 뿐 남편이 매주 금요일 퇴근길을 이곳으로 향할 때마다 본가에 남은 짐은 농촌유학을 위해 이곳 구례에 온 지 두어 달이 지난 무렵에도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이 손바닥만 한 집에 그 물건들이 어떻게든 자리를 잡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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