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마치 교통사고처럼 우울이 난데없이 찾아왔고 나는 정말 속수무책이었다. 모든 것이 비정상적이고 혼란스러웠으며, 나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할 수 있는 건 울거나, 혼자 있는 방에 틀어박혀서 티브이를 켜놓고 술을 먹는 일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그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처음 보는 얼굴과 낯선 음색은 심연을 바라보는 내 고개를 슬쩍 들게 했다. 그리고 유래없던 덕질이 시작되었다. 뭐라도 붙들며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생긴 사건이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아서 생긴 우울이었다. 모든 혼란을 잊고 싶고 그냥 다 피하고 싶었다. 철저히 사람을 피했다. 혼자 있을 때에는 언제든지 이어폰만 꽂으면 그 배우의 노래가 흘러나왔고, 나는 1초 만에 현실의 슬픔과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주구장창 들었다. 자면서도 들었다. 매주 방영일만을 기다리는 게 내 유일한 낙이었고, 경연이 종료되며 그 프로그램은 종영했다. 이젠 더 이상 기다릴 게 없어졌다. 그 배우는 본업이 소극장 뮤지컬 배우여서, 현재 서울에서 소극장 뮤지컬 공연 두 작품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 말인즉, 티비에서는 이제 볼 수 없지만, 내가 대학로의 그 작은 뮤지컬 공연장에 직접 가면, 실물을 볼 수 있다는 말이었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대학로에서 뮤지컬이라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뮤지컬이 사실 정확히 뭔지도 몰랐다. 노래하며 춤을 추는 건지, 아리아를 부르는 건지 헷갈릴 정도의 문외한이었다. 아주 예전에 남편과 연애를 할 때 '시카고'라는 대극장 뮤지컬을 세종문화회관 3층 끝에서 딱 한번 본 적이 있었다. 그게 다였다. 그때 내가 기억하는 건 너무 멀고, 관객은 너무 많았고, 모든 게 오버스러운 화려함으로 다가와서, 그저 어디 관광지를 한 번 본 것 같은 이벤트성 체험 정도로 사그라진 기억이 다였다.
그런데, 그 배우가 나오는 뮤지컬을 검색해 보니, 그건 그런 뮤지컬이 아니고 훨씬 작은 규모였다. 장소는 대학로의 '대명문화공장'이라는 곳이었고, 정말 작은 규모의 공간에서 단 3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국내 창작 뮤지컬이라고 했다. 심지어, 현재도 자리가 꽤 많이 비어서 사이드이긴 하지만, 앞에서 네 번째 줄인 자리가 마침 예약이 가능했다. 혜화를 단 한 번도 안 가본 내가, 제주도에서 그거 하나 보러 비행기를 타고 올라간다는 게 가당치 않게 느껴졌어야 했다. 하지만 매주 티비 방영일 하나만을 신처럼 붙들고 살던 게 사라지면서, 뭐 하나라도 붙들고 기다릴 그 무언가가 나에겐 절실했다. 그래서 나는 이성을 잃고 그 네 번째 자리를 새벽에 덜컥 예약했다.
그리고 한 달을 넘게 기다렸다. 실제로 보면 어떤 느낌일까? 정말 잘생겼을까? 체구가 훨씬 작을까? 노래를 잘할까? 무대랑 진짜 가까울까? 창작 뮤지컬이라니, 아동극 같은 느낌인가? 소극장 뮤지컬은 진짜 조용하게 봐야 한다는데 초짜인 내가 티 나지 않을까? 별의별 상상이 들며 나는 현실 속에서는 먼지처럼 굴러다녔지만, 머릿속은 오로지 한 곳을 향하며 삶을 부여잡고 현실을 부정하며 붕 뜬 채로 버티며 살아갔다.
그날이 왔다. 휴양지 여행을 가는 것도 아닌데 굳이 휴가를 내고 비행기를 타러 가는 내가 좀 어이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뭐 어때. 외국 여행보다는 합리적이잖아. 고작 김포공항에 가는 건데 뭐. 라며 스스로를 말도 안되는 논리로 정당화했다. 공항에 내려 지하철을 타고 처음으로 혜화역이라는 곳에 내렸다. 말로만 듣던 마로니에 공원을 직접 보니 빨간 벽돌 건물이 마치 외국에 온 것 같았다. 지방이 고향이자 지방대를 다녔던 나는, 서울은 홍대나 이대 앞 같은 유명한 역에나 몇 번 가봤지, '혜화'가 종착지였던 적이 없어서 너무 낯설었다. (근방에 서울대병원도 있고, 성균관대가 있는 줄도 몰랐다.)
두리번거리며 대명문화공장(현 yes24스테이지)을 찾아 들어갔다. 예쁘게 생긴 큰 건물이었다. 계단을 내려가서 사람들이 줄을 선 곳에 섰다. 티켓을 찾는 줄이었다. 또 아래로 내려가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앉거나 서성이며 휴대폰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거의 다 여자였다. 사실 전부 다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 풍경이 뭔가 또 낯설었다. 또 한차례 새로운 긴 줄이 있었다. 그게 뭔지 모르니 일단 줄을 섰다.
내 차례가 오니 그 줄 끝에는 캐스팅 보드가 있는 벽이 보였다. 내 앞사람들은 다들 그 벽을 조용히 열심히 찍었다. 그런데 다들 본인을 찍는 게 아니고, 정말 순수하게 그 벽만 찍고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럴 거면 왜 줄을 서는가 의문이 가긴 했지만, 뒷사람보고 나를 찍어달라고 하는 것도 웃긴 것 같아서 나 역시 똑같이 대충 캐스팅보드 벽을 찍고 쿨한 척하며 사라졌다. 출연진 3명 중에 진짜 나의 본진 얼굴과 이름이 박혀있는걸 실제로 보니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또 한 차례 아래로 내려가니 새로운 줄이 또 있었다. 굉장히 복잡했지만 뭔가 절차가 남은 것 같아서 나 역시 그 줄에 섰다. 그런데 다들 소지한 어떤 종이를 조용히 내밀고, 관계자가 거기에 도장을 찍어주는 것이었다. 그 상황파악을 거의 내 차례가 되어서야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고, 나는 그 '어떤 종이(재관람카드)'를 소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끄러워하며 그냥 눈을 피하며 도망치듯 조용히 줄을 이탈했다.
이제 딱히 할 게 없어서 화장실이나 들르려고 했는데, 아니 웬걸 티켓부스 줄보다 훨씬 기나긴 줄이 있는 것이다. 이러다 공연 전까지 화장실 안으로 못 들어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냥 넘기자니, 왠지 공연 중에 어마어마한 곤경에 처할 지도 못할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생겨서 또 줄을 섰다. 벌써 줄만 네 번째다. 공연 한 시간이나 전에 왔는데 시간이 너무 빠듯해지며 다리도 아파오기 시작했다.
어찌어찌 화장실까지 다녀오니 10분 전이었다. 이런! 나는 헐레벌떡 들어가고 싶었는데 희한하게 들어가지 않고 휴대폰 하며 태연하게 서있는 사람이 아직도 많았다. 공연 5분 전이라고, 안내직원이 입장하라고 말하고 있는데도 뭔지 모를 이 느긋한 문화를 그때의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드디어 공연장 안으로 입장했다.
생각보다도 훨씬 작은 무대, 아직도 기억나는 그 시원한 듯한 공연장 냄새, 쥐 죽은 듯 조용하게 앉아서 휴대폰을 보며 빽빽이 끼어 앉아 있는 관객들, 그리고 너무나 가까운 무대와의 거리, 이 모든 게 너무너무 낯설었다. 아니, 이렇게 가깝다니, 이렇게 가까운 곳에 티브이에서만 보던 막연한 내 본진이 조금 후에 실체가 되어 내 눈앞에 등장하게 된다니, 나는 너무 떨려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무대를 살펴보았다. 가운데에는 나무의자가 있고, 그 위에 작은 화분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다. 무대 왼쪽에는 피아노도 한대 있었다. 무대 오른쪽에는 낡은 책들이 쌓여 있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소박한 배경이 있었다. (내 기억이 틀릴 수도 있다)
약 10년 전 내가 처음으로 본 소극장 뮤지컬, 본진 얼굴 한번 직접 보고 싶어서 무작정 비행기 타고 올라가서 찾아간 극장, 이름도 낯선 뮤지컬 제목에다가, 단 3명만 출연한다는 뭔지 모를 비주류스러운 아날로그틱하면서도 자그마한 극.
그렇게 나는 내 인생 첫 뮤지컬이자, 본진을 처음 보게 된 그 뮤지컬을 운명처럼 접하게 된다.
그 뮤지컬 이름은 바로, 지금은 너무나도 유명해진 '어쩌면 해피엔딩'이다. 그리고, 누군지도 모르고 무작정 봤던 그날의 페어(출연진)는 무려, '정문성-전미도-고훈정' 배우님 이었다.
90분간의 극이 끝난 후, 내 인생은 완전히 다르게 흘러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