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은 우리 삶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공간이다. 평균 8시간 근무한다고 가정하면 하루의 3분의 1인 셈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이곳을 글로 거의 다루지 않는다. 연애, 취미, 여행, 가족은 수많은 문장으로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직장은 여전히 ‘말할 수 없는 곳’처럼 느껴진다. 왜일까?
직장은 대개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 안정적 소득의 원천, 자아를 보류한 채 타인의 질서에 편입되는 곳, 주말을 위한 인내의 장. 이렇듯 ‘직장’이라는 단어에는 기계적 반복과 감정의 억제가 깃들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공간을 피로와 교환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다고 여긴다.
하지만 직장은 가장 치열하게 언어를 훈련받는 곳이기도 하다. 주장을 보고서로 쓰고, 회의에서 상대를 설득하고, 메일로 이견을 조율하고, 대면 보고에서 말의 무게를 계산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 말하고 듣고 쓰는 이 활동은 ‘업무’라는 틀로만 정형화되지 않는다. 이 모든 과정은 언어를 다듬고, 사고를 훈련하며, 자아를 형성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요컨대 직장은 침묵의 공간이 아니라, 언어의 훈련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직업을 글감으로 삼기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 바로 ‘과잉의 익숙함’ 때문이다. 너무 익숙해서 사유하지 않고, 너무 반복돼서 기록하지 않으며, 너무 피곤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글쓰기로 이 익숙함을 낯설게 만들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회의, 업무, 실수, 피드백 - 그 안에 구조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리처드 세넷은 『장인』에서 말했다. "일은 자기 이해의 한 방식이다." 즉 우리가 직장에서 갈고닦은 숙련은 곧 세계를 해석하는 고유한 시선이 된다. 글쓰기는 그 시선을 언어로 옮기는 행위다. 결국 직장은 피로한 의무가 아니라, 해석 가능한 질서다. 그 질서 속에서 우리는 매일 새로운 문장의 소재를 마주하고 있다.
이러한 전환의 가능성을 보여준 작가들이 있다. 야마구치 슈, 강원국, 문유석, 호프 자런. 이들은 전혀 다른 직업적 배경을 갖고 있다. 그러나 직장에서의 업무 경험을 글쓰기로 승화시켰다는 공통점이 있다.
야마구치 슈는 철학을 전공하고 보스턴컨설팅그룹과 AT커니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일했다. 그가 활동한 분야는 냉혹한 시장 논리가 지배하는 기업 전략의 최전선이었다. 실적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는 그 세계에서 그는 전혀 다른 언어를 호출했다. 바로 철학이었다.
그의 대표작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는 이색적인 조합의 산물이다. 이 책은 철학이 실제 현장에서 어떤 인식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예컨대 장 폴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을 개인의 주체적 의사결정에, 카를 마르크스의 ‘소외’를 경영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 적용하는 식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철학을 쉽게 푼 것이 아니라, 학문적 개념을 실용의 언어로 ‘번역’한 사례였다.
야마구치의 글에는 직무와 사유의 긴장이 깃들어 있다. 그는 컨설턴트로서 기업에 솔루션을 제공했지만, 글쓰기에서는 그 이면의 구조와 맥락을 분석했다. 경영 컨설턴트는 수치화된 보고서와 프레젠테이션이 지배하는 업무 환경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철학적 개념을 실천으로 연결하는 ‘사유의 글쓰기’를 지향했다. 철학이 책상 위를 벗어나 시장과 조직, 인간과 관계의 실천적 틀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그의 글쓰기가 전하는 철학이다.
강원국은 대우그룹 회장의 연설문을 쓰는 담당자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을 역임하며, 국정 최고 책임자의 메시지를 다뤘다. 요컨대 그의 일은 항상 ‘대신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아닌 타인의 목소리를 설계하고 조율하는 작업 - 그 속에서 그는 자신의 언어를 잃지 않기 위해 글을 썼다.
그렇게 출간한 『대통령의 글쓰기』는 그저 글쓰기 매뉴얼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권력의 언어를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한 실무자가, 그 이면을 분석하고 성찰한 기록이었다. 강원국은 회의 메모, 보도자료, 스피치 원고 같은 문서를 쓰는 과정에서 단어 하나, 문장 하나의 맥락과 강도를 실험했다. 전달보다 설득, 정보보다 정서, 논리보다 감정의 타이밍에 집중하며 그는 실무의 언어를 곱씹었다.
실제로 강원국의 글은 간결하면서도 단단하다. 이는 반복된 실무에서 비롯된 숙련의 언어이자, 오직 자신의 문장을 갖고자 했던 노력의 결과다. 그는 글쓰기를 전달의 도구가 아닌 존재의 증명으로 삼았다. 그가 보여준 것은 실무자의 문장도 충분히 자기화될 수 있으며, 직업 속에서 언어가 자라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문유석은 판사로서 20년 넘게 일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를 지내며 민사재판을 주로 담당했고, 일선 법정에서 수많은 사건을 다뤘다. 그가 본격적으로 주목받은 계기는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에세이집이었다. 이 책은 딱딱하고 권위적인 판사의 이미지를 깨고, 인간적인 고민과 철학적 사유를 담은 글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판사유감』에서는 법원 조직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보여주었고, 『미스 함무라비』에서는 판사들의 일상을 소설 형식을 통해 이야기했다. 특히 『미스 함무라비』는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더 널리 알려졌다.
문유석의 글에는 법률가의 정확성과 문학가의 감수성이 동시에 흐른다. 그는 말한다. “판결문은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침묵으로 덮는다.” 실제로 판사는 판결문 외에 다른 방식으로는 자신의 견해나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글쓰기를 통해 그 침묵의 장벽을 넘어섰다. 제도와 윤리의 틀 속에서 드러낼 수 없었던 감정, 회의, 연민, 공감 - 그 모든 것을 글로 말했다.
이렇듯 문유석은 법의 언어가 포착하지 못한 세계를 문학으로 복원했다. 직업이 부여한 제한을 뛰어넘어, 판사로서의 경험을 고유한 시선과 언어로 재해석한 것이다. 법의 언어가 결론을 요구한다면, 문학의 언어는 여지를 남긴다. 그 여백을 그는 문장으로 채웠다. 직업에서 얻은 통찰을 자기 언어로 전환했을 때, 마침내 그는 ‘말할 수 있는 작가’가 되었다.
호프 자런은 지질학자이자 식물학자다. 미국의 대학에서 연구하며 실험실을 삶의 중심으로 삼아왔다. 『랩 걸』은 이러한 과학자의 삶을 생생하게 서사화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책은 과학 에세이에만 머물지 않는다. 여성 과학자로서 겪은 고립감, 연구비를 확보하기 위한 고단한 생존, 실험 실패의 반복과 동료와의 유대, 그리고 식물과 맺는 감정적 교감까지- 모든 것이 감각적인 문장으로 정돈되어 있다.
그녀의 말이다. “나는 식물에 대해 쓴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내가 쓴 것은 나 자신이었다.” 이는 과학자라는 치열한 직업의 한복판에서 비로소 발견한 자아의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자런은 데이터를 해석하듯 감정을 읽고, 실험 노트를 쓰듯 일상의 조각을 기록했다. 그 결과 그녀의 문장은 과학적 정확성과 문학적 서정성을 동시에 품는다.
실험실은 흔히 폐쇄적인 세계로 여겨진다. 온갖 전문 지식으로 쌓아 올린, 일반인들은 들여다보기조차 힘든 곳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그녀는 그 침묵 속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언어를 주조했다. 그것은 감정의 누설이자, 전문성의 서사화다. 자런의 글이 특별한 이유는 과학을 대중화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과학자의 복잡한 내면을 사회적 서사로 확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그녀는 글쓰기를 통해 과학의 지식을 정서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럼으로써 과학과 인간을 잇는 새로운 문장을 창조했다.
이 사례들이 보여주는 교훈이 있다. 장인의 시선으로 반복된 행위를 바라본다는 것. 같은 일을 오랫동안 해온 사람에게는 그 일만의 구조, 타이밍, 질서가 보인다. 그것이 바로 전문성이다. 이 전문성이야말로 글쓰기의 논리와 깊이를 제공한다. 흔히 전문가의 글이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전문가의 글은 비전문가보다 어렵지 않다. 오히려 단순하고 맥락이 뚜렷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조를 자기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이 글쓰기다. 관찰자는 감각을 언어로 옮기고, 숙련자는 논리를 이야기로 바꾼다. 반복의 내면에는 통찰이 있고, 통찰은 언어를 필요로 한다. 직업이 글이 되려면, 그 경험이 언어화될 수 있을 만큼 숙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언어가 타인에게 의미 있는 구조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야마구치의 철학, 강원국의 연설문, 문유석의 판결문, 자런의 실험 노트, 이 모든 것이 자기만의 언어로 형성된 구조다.
그렇다면 직업에서 과연 무엇을 써야 할까? 몇 가지 원칙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반복되는 문제나 비효율에서 내가 발견한 구조를 써야 한다. 같은 실패가 반복되는 이유, 회의의 비생산적 형식, 조직 내에서 보이지 않는 갈등 등, 나만이 알고 있는 ‘패턴’을 정식화하는 것이다. 둘째, 내가 획득한 기술이나 지식은 물론, 그것을 배우는 과정에서 겪은 시행착오도 기록해야 한다. 그래야만 생생한 감정과 서사가 생긴다. 셋째, 말로 표현되지 않는 ‘현장의 공기’를 포착해야 한다. 분위기, 긴장, 미묘한 인간관계의 결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언어화할 수 있을 때 글이 살아난다. 넷째, 그 모든 관찰과 분석을 통해, ‘나는 왜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바로 거기서부터 글은 개인적이면서 철학적인 깊이를 갖는다.
직장은 장인정신이 발현되는 곳이다. 시간이 쌓이고, 몸이 익숙해지고, 사고가 정교해지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일을 한다’. 그때의 감각을 잊지 말고 쓰자. 같은 파일을 열고 같은 회의를 하더라도 전날과는 다른 이해가 쌓인다면, 그것은 문장이 될 수 있다. 장인은 반복 속의 변화를 읽는 사람이다. 작가 또한 마찬가지다. 매일의 일상이 비슷해 보여도, 거기서만 드러나는 맥락을 포착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직업을 글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곧 내 삶의 가장 많은 시간을 언어로 복원하는 일이다. 일은 생계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인식의 발단이다. 그것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삶을 기록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해석하지 않는 직장은 삶에 짐이 될 뿐이다. 하지만 언어화된 직업은 작가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남들은 쓸 수 없는 것을 쓰게 해주기 때문이다. 직업은 삶을 지배하지만, 문장은 그 삶을 다시 구성한다. 그 한 줄이 당신을 바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