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피로를 실감하는 중년
10주간의 긴긴 여름방학이 끝나간다.
올해는 처음으로 두 아이가 입시생으로 공부했던 여름방학. 첫째는 SAT를 준비하는 한국 학원에, 둘째는 특목고 입시를 준비하는 다른 한국 학원에 다녔다. 아이들은 바쁘고 남편은 회사를 그만둔 지 어느새 1년이 된 터라, 시간도 없고 돈도 아끼고자 올 여름에는 큰 여행을 가지 않았다. 둘이서 번갈아서 아이들 학원에 데려다 주고 데리고 오고 회사에 다니며 여름을 보냈다.
그동안 아이들에 대해 쓴 브런치 글을 보니 내가 참 내 자식을 좋게 보느라 노력했구나 싶다.
첫째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가 갖고 있는 줄도 몰랐던 막연한 기대치를 하나씩 조용히 깨뜨려가며 자랐다. 좋은 일이다. 그렇게 부모를 조금씩 실망시키며 자라면, 미래의 눈물과 원망을 피할 수 있다. 이 아이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않는다. 그것도 재주다. 눈 앞에 가장 하고 싶은 것을 고르다 보면 그것이 이 아이를 어딘가로 데려갈 거라고 믿는다. 다만 한국 부모가 기대하는, 목표를 위해 인내하며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은 여태까지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보지 못할 것 같다.
둘째는 첫째보다 공부머리가 조금 더 좋고 완벽주의 기질이 있다. 누나보다 학교 성적이 좋았고 수학적 감각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동네 특목고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만. 이 아이는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니면 스스로를 부담줘 가면서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학교 공부는 꼭 해야 하는 일이지만 특목고 입시는 그렇지 않으니까. 머리는 좋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동기부여가 안되는 아이. 별다른 노력 없이도 잘 하니까 부모의 기대치가 높아지면, 바로 다음 순간 부담스럽다며 그만두어 실망을 준다.
"수학 잘하는 나"는 좋지만 어려운 문제 틀린 걸 고쳐가며 공부 많이 하는 건 싫어하고, 그러니 지금 무난히 잘하고 있는데 더 높은 목표에 도전하는 것도 싫은 거지. 공부 뿐인가, 다른 모든 분야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지난 몇 년 동안 내 브런치 글을 읽어 보면 언제나 "내가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면 아이들은 각자의 인생을 찾아갈 거야"라는 결론으로 글을 맺곤 했다. 이번 여름에 보니 나는 앞으로도 계속 뒤로 물러나 있어야 하고, 아이들이 찾아갈 각자의 인생은 최소한 대학 입시를 통해서는 성과를 볼 수 없을 것 같다.
아이들은 건강하고 착하고 부모형제와 사이가 좋다. 기본적인 생활습관, 독립적인 학교생활, 무난한 사회생활을 한다.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면서도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실망감은 어쩔 수 없다. 그 동안 우리 부부가 제공한 온갖 자원과 기회를 생각하면 맥이 풀리지만, 자녀를 키우는 것이 어디 인풋을 넣는 만큼 아웃풋이 나오는 것이던가.
미국은 여름방학이 너무 길다 보니 매년 여름이면 공들여 아이들의 방학 계획을 세워야 한다. 내가 직장을 다니느라 매일 보육시설에 보낼 때도, 직장을 그만두어 여기저기 여행을 다닐 때도, 코로나로 집안에서 엄마표 방학을 보낼 때도, 여름은 언제나 일 년 중 가장 심혈을 기울인 시간이었다. 해마다 테마를 정하고 그에 맞춰 열심히 계획세우고 실행하기를 반복했는데, 실행이 쉽지도 않았지만 했더라도 원했던 결과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올해도 마찬가지. 돈도 아껴야 하니 큰 여행을 가지 않았다고 썼지만, 실제로는 어지간한 여행비만큼의 학원비와 각종 섬머캠프비를 썼다. 둘째는 처음으로 2주 동안 친한 친구와 함께 디베이트 캠프를 다녔고, 역시 처음으로 1주일 동안 기숙형 재즈음악 캠프에 다녀왔는데, 다닐 때는 좋았지만 막상 다녀와서는 과연 언제 그런 곳을 다녀왔나 싶을 정도로 깨끗이 잊어버린 것 같다.
마지막 주에 학원이 모두 끝나고 첫째의 첫 SAT 시험도 마치고 나서 뉴저지의 동해안인 Jersey Shore에 다녀왔다.
한 시간 반 거리인데 너무나 부유하고 잘 정돈된 동네라서 잠시 다른 세상에 찾아온 느낌이었다. 일출을 보고, 서핑레슨을 받고, 호숫가를 걷고, 일몰을 봤다. 가져간 책을 한 권 읽고 밤에는 보드게임을 했다. 가족 모두 수고했다고 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2박3일을 보냈다.
올 7월에는 재작년에 인상깊게 읽었던 일본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재독했다. 8월에는 김하나 작가가 서양 고전 문학에 대해서 쓴 <금빛 종소리>를 조금씩 읽으며 그 책에서 다룬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읽었다. 그 책에서 다룬 또다른 소설인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는 책으로 읽기는 어렵겠고 이번 주말에 영화를 볼 계획이다. 여행지에서는 서양미술 역사상 (정부와 군대를 제외하고 개인으로서는) 가장 많은 미술품을 훔친 도둑에 대한 논픽션 <예술 도둑>을 읽었다.
이렇게 2025년의 여름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