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하게 기다려주는 육아가 실패하는 순간
바로 이전 글에서 여름 동안 첫째는 SAT 준비학원을 둘째는 특목고 준비학원을 다녔다고 썼는데, 하루 만에 정정하게 되었다. 여름 동안 다녔던 건 맞지만, 둘째는 더 이상 특목고 준비학원을 다니지 않기로 했다. 아예 시험을 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시험은 볼지도 모르지만, 아마 준비는 따로 하지 않고 그냥 갈 듯 하다.
그렇게 맨손으로 가면 경쟁률이 10대 1이니 합격할 것 같지도 않고.
아이가 그 학교에 다니고 싶은 강렬한 의욕이 없어서 시험공부도 따로 안하겠다고 하는 것이니, 붙을 것 같지도 않지만 붙은들 간다고 할까?
사람 마음은 간사해서 붙으면 간다고 할 수도 있다.
영어로 13을 thirteen이라고 하는 건 도대체 누가 처음 시작했는지 생각할수록 무릎을 치게 된다. 열한 살, 열두 살은 아직 어린이다. 열세 살이 되어야 teenager다. 어쩌면 우리 집 아이들은 이렇게 열세 살이 되면서 조용히, 그러나 확고하게 자기 자신을 주장하기 시작하는 것인지.
아니, 생각해 보니 이 아이는 열 살 아니 네 살부터도 이미 그랬던 것 같다.
여름 동안 특목고 준비반을 다니면서 아이가 마음은 그다지 거기 있지 않다고 느꼈다. 학교숙제 이외의 엑스트라 공부를 할 때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그런데 이 특목고는 들어가기도 힘들지만 들어가고 나면 정말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곳이라서, 남편은 "본인이 강렬히 원하지 않으면 가지 않는 게 낫다" 라고 생각했다. 물론 나도 100% 동의하는데, 다만 나는 "붙고 나서 고민해도 괜찮다" 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던 것 같다.
뉴저지 버겐카운티의 모든 한국 아이들이 본다는 시험이다. 모든 한국 아이들은 물론 과장이겠지만, 진짜로 내가 아는 집 애들 중에서 이 시험을 안 본 아이는 우리집 첫째밖에 없는 것 같다. 우리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모를까? 다른 사람들은 바보라서 아이들을 공부시켜 이 시험을 보게 했을까?
3000명이 지원해서 300명을 뽑는 학교다 보니, 모든 아이들이 정말로 이 학교에 붙을 가능성이 있어서 지원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에는 미국 중학교의 공부가 허술하다 보니 이 입시를 계기로 아이들이 중학교 과정을 단단히 한다는 차원에서 시험준비를 시키는 부모들도 많다.
어쨌든 남편은 아이가 마음이 거기 있지 않다고 느꼈고, 본인의 마음이 없는 프로젝트에 돈과 시간을 들여 아이를 들이미는 것이 영 아니다 싶었던 모양이다. 부모와 아이가 마주보고 앉아 이야기를 하는 시간을 가졌고, 아이는 솔직히 그 학교에 그렇게 가고 싶지는 않고, 시험을 볼 생각은 있지만, 시험날까지 앞으로 10주 동안 매주 토요일에 학원을 다니고 싶지는 않다는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
인생의 딱 열 번 토요일인데, 목적이 무엇이든지간에 공부를 하기 위해서 그 시간을 들이는 게 싫다는 아이를, 이해하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의 의견을 물었고, 아이는 자기의 의견을 확실히 밝혔으니 듣고 무시할 수는 없다.
학원의 가을학기 특목고 준비반은 등록을 취소하고 환불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아이는 학원은 다니고 싶지 않고 그냥 혼자 공부하는 게 낫겠다고 했는데 그건 허튼소리다. 두 가지 이유. (1) 아이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학교 공부 이외의 것을 학원이나 엄마의 관리 없이 혼자 해 본 적이 없다. 한 번도 안 해봤으면 이제 와서 마음에도 없는 입시준비를 위해서 혼자 공부할 수 있을 리가. (2) 이 입시는 교재나 문제집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학원들에서 확보하고 제작한 모의고사를 반복해서 풀고 복습하는 형식으로 공부하는 것이라서 아무 자료 없이 혼자서 집에서 공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별도의 공부를 하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수학을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따로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음악을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따로 연습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놔두면 하루종일 컴퓨터만 하겠지.
아무것도 따로 노력하고 싶어하지 않는 아이가 너무 실망스럽고,
모든 것을 컴퓨터와 온라인으로 하는 아이가 너무 못마땅하고,
도대체 내가 뭘 잘못 키운 건가 머릿속이 혼란할 뿐이다.
어렸을 때부터 슬쩍 기회를 주되 강요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이 아이는 아주 조금만 부모가 기대를 갖고 들여다본다 싶으면 거부해 왔다. 대놓고 하기 싫다며 반항하는 건 아닌데 물가에 억지로 끌고 간 말처럼 고집스레 물을 안 마시고 버틴다.
네 살때 한글학교가 그랬고, 3학년 때 학교에서 수학우수반에 들었을 때, 그리고 초등학교 동안 피아노를 배우면서도 그랬다. 중학교에 들어와서도 수학이랑 색소폰을 두고 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아무 기대 없이 가만히 두면 의외로 잘한다. 그래서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관심을 갖고 다음 레벨로 끌어올리려 하면 흥미를 잃고 안한다며 버티기 시작한다.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면 혼자 알아서 잘 했을까? 그런데 그게 가능했을까?
아이가 "처음 치고는 잘한다" "준비 안한 것 치고는 잘했다"고 느끼는 수준에서 만족하고, 다음 수준으로 올라가려고 노력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마음이 괴롭다. 혹시나 "내가 하고 싶어서 노력했으면 할 수 있었는데, 별로 하고 싶지 않아서 안 한 거야"를 평생 핑계로 삼아 노력을 회피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건 아닌가. 평생 그렇게 살 리는 없지만, 지금 내 눈 앞에서 중학생 자식이 이러는 것을 보는 것은 너무 속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