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직권남용
굳이 힘든 학교를 다니고 싶지 않아서, 꼭 다니고 싶지도 않은 학교에 지원하느라 따로 공부하고 싶지 않아서 올 가을 특목고 입시를 준비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아들의 의견을,
부모의 직권으로 하루만에 번복시켰다.
전날 저녁 새벽 3시까지 남편과 열띤 토론.. 까지는 아니지만 각자 떠오르는 생각들을 쏟아냈다. 언제나 느끼지만 육아는 부모를 반영한다. 자녀의 생각과 행동을 해석하고 예측하는 모든 도구는 부모 자신의 경험과 생각에 제한되어 있기 때문.
다음날 아들을 데리고 20분 거리의 안과에 가느라 운전을 시작하며 말을 꺼냈다. 엄마가 할 얘기가 있다. 도착하기 전에 끝날 테니 일단 들어라.
1. Best Interest of Child - 미국 가정법에는 이런 개념이 있다. 부모의 이혼이나 사망시에 남겨진 아동의 양육권을 결정할 때 최우선적인 기준인데, 아동 본인의 의견은 중요하게 고려되지만 그게 최종은 아니다. 아동에게 중요한 결정은 본인 뜻대로 결정하게 하지 않는다. Best Interest of Child를 염두에 두고 어른이 결정한다.
2. Fear of Effort - 미리 준비해서 줄을 치고 페이지를 접어 놓은 책의 한 부분을 읽게 했다. 이전에 브런치에도 쓴 적 있는 <영리한 아이가 위험하다 (Smart Parenting for Smart Kids)>의 한 문단이다.
With some bright children, lack of effort is a self-protective strategy. They tell themselves, "I could do it; I just don't want to." By never trying, they avoid putting that assumption to the test. Despite their bravado, these children harbor secret doubts about their abilities. We've noticed that the more adults tell them, "You're so smart! You could do so well if you'd just try!" the more these children resist trying.
영리한 아이들에게는 노력하지 않는 게 방어기제로 작동하기도 한다. "하려면 할 수 있었는데, 난 그냥 하기 싫어서 안 한 거야" 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도하지 않으면 실패하지 않는다. (하기 싫어서라고) 큰소리를 치지만, 실제로는 본인의 능력에 대해 확신이 부족한 것이다. 이런 아이들은 어른들이 "넌 똑똑하니까, 조금만 노력하면 해낼 수 있어" 라고 강조할수록, 점점 더 절대 안 하려고 든다.
이미 몇 년 전에 이건 우리 아이다! 라고 형광펜으로 줄을 쳐 놨던 부분인데, 이번에는 그 대목을 직접 읽히면서 너에게 이런 면이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3. Triangle of Capacity - 이건 이미 3년 전, 5학년 때 아이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사람은 지력 - 심력 - 체력의 세 꼭지점으로 본인 능력의 크기를 이루는데 너는 심력과 체력에 비해 지력이 지나치게 발달했으니 체력을 기르자고 했다. (실은 그 때 친구가 별로 없어서 시간이 많이 남는 김에 매일 한 시간씩 운동을 시키느라 그랬다.) 그 때 그 얘기 기억하고 있겠지. 이제 네가 몸은 많이 자랐지만 멘탈은 아직도 키워야 한다.
4. Supercomputer in Your Brain - 네가 머리가 좋은 줄은 안다. 그런데 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수퍼컴퓨터가 너무 발달해서 너 자신도 모르게 미래로 달려나가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가능성을 먼저 감지하고 현재로 가져와서 너를 두렵게 하는 것 같다. 실패의 가능성도, 힘든 노력도, 다 해보기도 전에, 그리고 실제로는 성공의 가능성이 꽤 높은데도, 네 머릿속의 수퍼컴퓨터는 벌써 실패의 가능성을 계산중이다. 자기 머릿속이 속삭이는 이 모든 두려움을 이기는 건 너무너무 힘든 일이지만, 무시할 줄 알아야 한다. 운동이든 음악이든 공부든, 지금 중학생 나이는 실패해도 떨어져도 아무런 타격이 없는 시절이기 때문에 노력하고 이기고 지고 붙고 떨어지는 걸 다 지금 해봐야 한다.
5. PSLE (Primary School Leaving Examination) - 싱가폴에 살 때 PSLE 얘기는 너도 들었겠지. 싱가폴에는 모든 6학년이 의무적으로 초등학교 졸업시험(PSLE)을 보는데, 이 시험 결과에 따라 인생의 길이 갈린다. 이 시험을 잘 보면 일류 중학교에, 그리고 최하 레벨의 그룹은 아예 중등학교에 진학을 못하고 직업훈련의 길로 간다. 그런데 이 시험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수다. 네가 이 시험을 본다면 열심히 공부했겠니? (이 아이는 열심히 공부했을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그리고 잘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미국은, 이 나라는, 모든 것을 개인의 선택으로 치환한다. 엉망진창이 될 만큼 모든 것을 개인의 탓으로 돌린다. 필수였다면 열심히 했을 수 있는데, 선택이라면 하기 싫어지는 건 사람의 본능이다. 거기 지지 마라. 특목고 입시를 중학교 졸업시험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해라. 어차피 떨어져도 별로 불이익은 없다.
자. 그러니 너는 올 가을에는 특목고 입시에 참여하는 걸로 한다.
여기까지 얘기하니 딱 20분이 지나 안과 앞에 도착했다.
미국에서 자란 남편은 경쟁이 심한 특목고에 들어가는 것도 힘들지만 다니는 것은 더 힘드니 "본인이 강렬히 원해야만 할 수 있다"는 미국식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그러니 자꾸 아이한테 "정말로 원하니? 원하면 하고 원치 않으면 하지 마라" 라고 하면서 아이가 "정말로 원합니다, 제가 꼭 할께요!"라는 대답을 기대하는데, 한국에서 자란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아직 어린 아이에게 힘든 걸 들이밀며 "이건 정말 힘든 일인데, 꼭 원하면 해라"라고 말하는 건 하지 말라고 하는 거나 다름없다.
동기부여는 중요하지만 중학생에게 어떤 엄청난 사명감이나 목표의식을 기대하는 건 어른의 착각이다. 중학생의 목표의식은 아주 단순한 이유이거나 (ex: 멋있어 보인다), 아니면 거창한 목표의식을 찾지 말고 "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냥 한다" 정도면 충분하다고 본다. 굳이 목표의식을 찾는다면 먼 미래에 대한 것보다 "오늘 하루 뿌듯하게 잘 보내야겠다" 정도면 된다. 아이에게 야심고백을 강요하면 안 된다 (강요할수록 도망가기 때문).
그렇게 하루만에 우리 아들은 다시 특목고 입시를 준비하는 것으로 입장을 바꿨다.
정말로, 시험은 떨어져도 괜찮다.
나는 이 아이가 자기가 실패할 수도 있는 어려운 일에 도전하기를 바란다.
본인이 두려워서 결정을 못 한다면 엄마가 대신 결정해서 등 떠밀어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