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장편소설
11명의 대가족이 하와이에 간다. 모두 다른 사람들이니 하와이에서 원하는 것도 제각기 다르다. 가족들은 여행의 끝에서 한자리에 모여 하와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물건, 또는 경험을 공유하며 할머니의 10주기를 기념한다.
정세랑 작가의 소설 <시선으로부터>의 설정이다.
지난 연말 우리 가족의 하와이 여행도 비슷했다. 우리는 10명이었다. 여행의 끝에서 우리는 각자 미리 제비뽑기로 정한 마니또에게 그가 제일 좋아할 것 같은 하와이의 기념품을 선물하며 할머니의 72번째 생일을 축하했다. 책을 읽고 따라한 것도 아니었는데 어쩌면 이렇게 비슷한 설정이 되었을까?
하와이가 주는 마법이었을 것이다. 남녀노소 각자 자신의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공간, 모두가 행복해지는 날씨, 그리고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찾아오는 태평양 한 가운데의 섬.
하와이를 겪고 와서 이 소설을 다시 읽으니 등장하는 장소들과 사람들의 행동이 훨씬 더 생생했다.
나는 여행을 기획하고 명확하게 지시하는 명혜였다. 비숍 박물관을 드나들며 하와이 역사를 공부하는 난정이었다. 말라사다 도넛이 식기 전에 가족들에게 맛보여 주려고 두 박스 들고 허겁지겁 숙소로 돌아오는 태호였다. 그리고 나는 하와이를 대표하는 액티비티, 서핑을 배우는 우윤이었다.
<시선으로부터>의 가족들은 모두 심시선 할머니로부터 비롯하였다. 심시선은 존재하지 않는 인물, 아마 한국에 존재하기 어려울 어머니이자 할머니이다. 그는 예술가였고 동시에 여걸이었다. 두 번 결혼했지만 인생에 남편의 흔적이 별로 없었다. 한마디로 그는 가모장이었다. 심시선의 자손들은 부계 혈통으로 물려받은 유전자를 제외하고는 전부 모계의 영향력 아래에서 자랐고, 심시선이 세상에 남긴 수많은 말과 글로 사후에도 오랫동안 그를 떠올리고 그와 대화했다. 그의 후손이 되었다.
우윤은 장례에도 가지 못했지만 괜찮았다. 할머니는 장례 같은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가 들어가는 단어는 사실 묶어서 싫어했다. 모던 걸. 우리의 모던 걸. 내 모든 것의 뿌리.
심시선은 모든 의례를 싫어했고, 본인의 유골도 먼 바다에 뿌려버리게 했다. 그런 시선의 자손들이어서인지 다섯 명의 손자녀들 대부분은 단호히 또는 슬그머니, 자식을 낳지 않고 살겠다고 마음먹는다.
화수는 멈추고 끊겨 전달되지 않을 것들을 헤아려보았다. 어릴 때 엄마들이 머리를 묶어주던 여러 방식, 변형된 자장가들, 절판된 그림책들, 배앓이를 할 때 민간요법, 카나페 레시피들, 냉동실의 미니 눈사람, 잔 흠집으로 뒤덮여 그것이 무늬처럼 된 반지, 함께 제야의 종소리를 듣기 위해 모이던 습관, 카드놀이의 이례적인 규칙, 죽고 없는 사람들이 가득한 사진 앨범들, 무겁지만 시원한 대나무 돗자리, 변색된 병풍, 마흔 살짜리 화분, 우표 부분이 다 뜯겨나간 편지들, 홀수로 남은 잔들... 그렇지만 상실감도 물려주지 않을 수 있겠네.
주변의 부모님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이드실 때 SNS에서 본 칠순 잔치들이 기억난다. 특급 호텔에서 잔치를 열며 "아버님 그늘에 감사합니다" 종류의 현수막을 걸거나, 번듯한 대가족 사진 밑에 비슷한 멘트를 달은 게시물들이었다. 내가 삐딱한 탓이겠지만 성인이 되어버린 자식들과 그들의 자식들의 위에 떡하니 자리잡은 (할)아버지 그늘이라는 표현은 언제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시선은 자손들에게 그늘이 아니라 양분이 되었다.
모든 것은 사라질 것이다. 가족들에게 소중했던 모든 물건은 결국 사라지고, 대부분의 기억도 바랜다. 사람은 죽고, 관계는 잊혀진다. 내가 쓴 그 어떤 글도 내 자식에게는 읽히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이 한국어로 긴 글을 못 읽는다). 나의 손자손녀는 아마 한국말을 못할 것 같지만, 손자손녀가 없을 가능성도 매우 크다. 심시선 같은 어머니나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자꾸 나의 것을 자식들에게 남기고 전하려 들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 다만 용감하게 살다 가는 자유로운 노인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