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다닥 옷을 사러 갔다.
우리 회사는 변호사 세 명이 재택으로 일하는 작은 로펌이다. 원래는 맨하탄 한복판에 번듯한 사무실이 있었는데 코로나 동안 철수해서 각자 집에서 일하다가, 우리처럼 작은 규모에 비싼 맨하탄 사무실을 유지하며 모두가 출퇴근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이렇게 굳어졌다.
나는 코로나 전에 회사를 그만두고 싱가폴로 이주했다가, 미국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합류했다. 4년 동안 전업주부로 있다가 다시 일하는 게 부담스러울 수 있었는데, 예전에 일하던 사람들과 함께 재택으로 근무한다니 이정도면 생활에 큰 변화 없이 가정도 돌보고 일도 좀 하고 돈도 좀 벌 수 있겠다 싶어서 쉽게 결정했다.
그렇게 2년 반 동안 재택으로 일하다가 갑자기 뉴저지에 사무실을 마련해 모두 주 3회씩 출근하기로 했다. 한 번 아이디어가 나오니 3주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비서와 경리도 새로 고용해서 5명이 사무실에 처음 모이는 날이 바로 내일모레 월요일이다.
요즘에 아이들이 많이 바빠서 가정과 재택근무 사이에서 쳇바퀴 돌아가듯 단조롭고 정신없이 살고 있었는데, 토요일이 되니 번쩍 정신이 들었다. 출근할 때 입을 옷이 하나도 없잖아!!
마지막으로 사무실에 출근했던 때가 2018년 6월이었다. 엄마가 7년 만에 사무실로 나가게 되었는데 입을 옷이 없어서 옷을 사야겠다고 하니 둘째가 와, 7년이면 내 인생의 절반이 넘네! 한다. 그 때 3학년과 유치원생이었던 아이들은 이제 고등학생, 중학생이 되었다.
토요일 오후, 출근복을 쇼핑하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쇼핑센터에 뛰어갔다. 피팅룸에 서보니, 그동안 추리닝과 청바지만 입던 몸은 어느새 40대 초반에서 40대 후반의 것이 되어 있다. 몸무게나 사이즈는 그대로인데 무언가 없어졌다. 젊음은 나를 타고 딸에게로 흘러갔고, 조금 남아 있던 귀여움도 사라졌다. 반짝인다고 모두가 칭찬하던 눈은 안구건조증으로 힘을 잃고 눈꺼풀이 처졌고, 지난 가을부터 꾸준히 다닌 수영 때문에 머리카락은 마른 미역처럼 푸석푸석.
고등학생과 중학생은 엄마가 출근을 시작한다는 소식에 아무런 요동이 없다. 한때 엄마가 왜 출근하기를 그만두었는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기억이 없겠지.
왜 그만두었는지는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 그 때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종일 관심을 받는 그들의 하루하루에 어떻게 윤기가 흘렀는지, 엄마에게 시간적 체력적 여유가 생기니 하교 후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오후에는 운동 레슨과 방학에는 여행 등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걸, 이제 와서 내 입으로 얘기하면 변명 같아서.
이제 청소년들은 엄마가 집에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는다. 엄마가 바빠서 자기들 일에 신경쓰지 못하고 내버려두면 더 좋아할 것이다. 필요한 라이드와 음식이 그때그때 제공되는 한. 엄마가 일을 더 해서 돈을 더 벌어 오면 더 좋겠지. 이제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그렇게 바뀌었다. 성장의 단계마다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다른데, 매 단계마다 그걸 맞춰줄 수는 없는 일이다. 본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아이들은 잘 알지도 못했고 요구한 적은 더욱더 없다.
첫 출근을 했을 때가 2015년 초였으니 10년 전이다. 가정폭력을 당하는 여성들을 돕는 법률단체에서 인턴으로 몇 달 동안 일하다가 그 해 가을부터 지금 회사에 다니기 시작했다. 킨더가든과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을 두고 일을 시작하던 그 때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어떻게 출근을 준비했는지 나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아이들 보육에 구멍이 생기지 않도록 이리저리 계획을 세우느라 막상 출근하는 날이 되기 전까지는 제대로 옷도 없었을 것이고, 직전 주말쯤에 급히 옷을 사러 당시 살던 주상복합 아파트의 1층 상가에 내려갔을 것이다. 피팅룸에서 서둘러 까만 정장바지와 셔츠를 입어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때는 아직 앞날에 대한 부푼 희망과 야심으로 거울 속 내 모습을 보면서 남몰래 웃어 보았을까? 아니면 내 얼굴이 지쳐 보인다며 스스로 안스럽게 여겼을까? 30대 후반이 아직 귀엽고 예쁜 나이라는 걸 그땐 알았을까?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가족들이 기억할 리가.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의 필요는 달라지고, 주어진 상황도 달라진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만이 변하지 않는 진리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에너지 레벨은 낮아졌다. 과거의 영광, 과거의 헌신, 모두 색이 바래고 잊혀진다. 그렇지만 그 과거의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편안함과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면 허무함이 덜해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