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떠보니 퇴사를 했다. 도쿄에 다녀와 회사 분들에게 줄 도쿄 바나나를 잔뜩 사와 기분 좋게 나누어준 날, 팀장님이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퇴사를 해야 한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했다. 물론 절대 나의 자발적인 퇴사가 아닌 회사 상황으로 인한 인원 감축에 따른 퇴사 권유였다. 아직 나와는 상관없는, 멀고 먼 미래에 일어날 줄만 알았던 구조조정 권고사직. 스물다섯 살에 회사에 들어와 스물여섯 살이 되었고 들어온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내가 들으면 눈물부터 줄줄 흐를 수밖에 없는 단어였다. 평범하게 잘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다. 이제야 적응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도, 업무들도 안정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팀장님과의 면담이 끝나고 바로 엄마에게 울고 불며 전화를 걸어 갑자기 퇴사를 해야 한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의외로 엄마의 대답은 쿨했다. 괜찮아! 진짜 괜찮은 걸까 나. 진짜 괜찮아질 수 있을까 나. 지금은 하나도 괜찮지 않은데 아무렇지 않게 괜찮다고 하는 엄마의 대답을 들으니 조금은 괜찮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퇴사는 하루아침에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내야 할 서류는 어찌나 많은지, 퇴사 사유에 퇴사를 하고 싶지 않은데요 라고 삐뚤어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불러주는 대로 이유를 적었다. 불현듯 남자친구와 이별을 했을 때가 떠올랐다. 밤새 울다 지쳐 나도 모르게 잠에 들고 일어나면 순식간에 남자친구가 사라져있는 느낌과 비슷하달까. 다른 점이 있다면 원망할 대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헤어지자고 말한 남자친구를 원망하면 되는데 이건 형체 모를 무언가를 원망해야 했다.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사람을 나가라고 할 거면 처음부터 나를 왜 뽑은 건지 억울했다. 회사 분들과 오만 정을 다 붙여놓고 이제 와서 왜 나가라고 하는 건지 미웠다. 그래도 후회되는 일은 없었다. 불만도 이야기하지 않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말을 잘 듣는 착한 사원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각기 다른 마음가짐으로 회사를 다닐 테지만, 나는 무엇이든 배우고 싶었고 그만큼 쑥쑥 자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세차게 물을 부은 듯 차갑게 식어 버린 내 열정이 초라해질 뿐이었다.
지금은 퇴사를 한지 이 주가 넘게 흘렀다. 퇴사를 하기 전과 후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여유를 만끽할 수 있다는 것.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아오다가 갑자기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처음으로 여유라는 것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결국 시간이 되어버린 셈이다. 처음에는 퇴사를 하고 나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줄줄줄 적곤 했다. 퇴사하자마자 제주도에 내려가서 게스트하우스 스태프를 해봐야지. 무주산골영화제 자원봉사를 했었으니까 다른 영화제도 찾아서 해봐야지. 공기 좋은 곳으로 템플스테이도 떠나봐야지. 면허도 바로 따서 실컷 운전도 해봐야지. 너무나 하고 싶었지만 회사를 다니느라 할 수 없었던 재미난 일들을 할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지만 막상 퇴사를 하니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정말 아무것도. 그저 누워있고 싶었다. 결국 올해까지는 쉬는 것을 택했고 그렇게 회사를 다니면서 나빠졌던 건강, 달고 살았던 병들, 꽉 차있던 스트레스가 모두 나았다. 결정적으로 월요병이 완치되었다. 토요일로 시작해서 토요일로 끝나는 토토토토토토토의 삶을 살다 보니 비로소 진심이 담긴 월요일 좋아! 를 외칠 수 있는 스폰지밥이 되었달까. 하지만 어딘가 공허한 마음 한구석은 아직도 낫지 않고 있다. 매일매일 가던 출근길과 매일매일 보던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니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다. 퇴사를 했다기보다는 기나긴 휴가를 쓴 느낌이다. 내일은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내면 좋을까. 일단 푹 자고 일어나서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다. 이제는 마음껏 그래도 괜찮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