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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희 May 03. 2024

제주도에서 삼주살이

“제주도로 놀러 와. 와서 우리 집에서 지내도 돼.“

갑작스레 퇴사한 나에게 제주도에 살고 있는 친구가 선뜻 건네준 말이었다. 그렇게 작년 겨울부터 미루고 미루던 제주도를 봄이 다 되어서야 왔다. 작년에도 혼자서 찾았던 제주도는 올해에도 혼자서 찾기에 충분했다. 혼자서, 가족들과, 친구들과 찾았던 제주도는 어느덧 이번이 다섯 번째. 다섯 번이나 왔음에도 시간을 쪼개 짧으면 이박 삼일, 길면 삼박 사일 머물렀던 제주도는 언제나 떠날 때 아쉬움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친구의 도움을 받아 조금은 길게 제주도에 머물 수 있었다. 정한 기간은 일주일. 육지로 돌아가지 말라는 친구들의 한마디로 결국 일주일이 이주일이 되고 이주일이 삼주일이 되고 말았다. 그만큼 제주도에서의 하루들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여행을 가게 되면 항상 열심히 집에서 세워온 계획을 펼치고 그대로 차곡차곡 움직여왔다. 계획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기보다는 계획이 없으면 불안해하는 편이라 계획 없이 여행을 한다는 것은 나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기만 믿고 따라오라는 친구의 말을 믿고 계획을 아예 세우지 않았다. 제주도에 사는 친구가 내 계획이 되어준 셈이다. 그렇게 일분일초가 급해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까워했던 내가 오후에 느지막이 일어나 밥을 먹으면서 어딜 갈지 생각해 보고 있었다. 하루에 수십 번씩 하늘로 떠오르는 비행기를 멈춰 서서 가만히 올려다보고, 지나가다가 눈에 담아뒀던 쌀국숫집을 가기도 하고, 가고 싶었던 카페를 걸어가다가 불쑥 다른 카페에 들어가기도 했다. 우연히 발견하는 것을 싫어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저 즐길 여유가 없었던 거였구나. 대체 뭐가 그리 바빴던 걸까. 어떤 것이 이리도 나를 급하게 만들었을까.


바다가 너무 좋아 바다가 있는 곳에서 살고 싶어 했던 내가 바다가 있는 제주도에 이렇게 길게 머무는 날이 오다니. 운전면허를 따고 우도에서 처음 운전해 본 전기 자동차, 노을 지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운 좋게 본 돌고래,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노래 삼아 들으며 누워있던 치유의 숲,  여행 속의 여행으로 갑자기 애월로 가게 된 글램핑까지. 제주도에 있는 시간 동안 바다를, 숲을, 노을을 마음껏 보고 듣고 느꼈다. 이 기나긴 휴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남은 시간을 빈틈없이 즐겨보려고 한다. 지금보다 나중이 더 중요했던 나인데 자꾸만 지금이 더 중요해지고 있는 것만 같다. 제주도에서 한 달을, 두 달을 살아보는 날이 또 오기를. 그래도 너무 좋으면 어떡하지. 그때는 제주도에서 확 살아버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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