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으로 이끈 양조위, 그리고 홍콩 영화들
살아 보지도 않은 시절을 그리워 하게 되는데, 나에겐 그 시절은 홍콩의 전성기가 아닐까 싶다. 영화로만 접하던 그 때 그 시절의 홍콩. 네온사인 간판이 빛을 내고, 중국에서 느낄 수 없는 엄청난 자유로움을 사람들은 만끽하고 있지만 곧 반환될지도 모르는 불안함도 함께 느껴지는 그 시절 말이다.
내가 홍콩 영화를 처음 접한건 엄마가 거실에서 보고 있던 <첨밀밀>이었다. 엄마가 이 영화 참 좋다며 나에게 소개를 해주었고, 그대로 그 영화의 매력에 빠져 한참을 보았다. 그리고 우연인지 운명인지 그 다음 달, 바로 CGV에서 왕가위 기획전이 열려, <화양연화>를 보러 아침 일찍 영화관으로 향했다. 그 때의 나는 몰랐을 것이다. 그 발걸음은 바로 내가 홍콩 영화로 빠져들기 시작한 내딛음이었으며, 그 발걸음이 홍콩까지 이어진다는 것을.
<화양연화>를 시작으로 <중경삼림>, <해피투게더>, <아비정전> 등 왕가위의 모든 작품을 다 섭렵하게 되었고, 심지어 첫 회사 첫 퇴사를 하고 떠난 제주도에서 <동사서독>을 보면서 숙소에서 마무리했던 기억도 있다. 그 뒤로 왕가위 뿐만 아니라 홍콩 무협 영화도 보게 되었고, 장국영의 필모그래피를 보고 싶어서 <영웅본색>, <천녀유혼>, <패왕별희> 등 정말 많은 홍콩 영화를 보았다.
그 결과 양조위 덕질을 시작했다. 왜 양조위였냐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중경삼림>의 그 장면으로 답을 하겠다.
영화관에서 <중경삼림>을 딱 볼 때, 이 장면에서 '허억!' 소리가 나와 입을 틀어 막고 영화를 보았다. 지금까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며 가장 행복했던 순간 TOP 5안에 들어갈 것이다. 이 장면 이후로 <중경삼림>의 왕페이처럼 양조위의 매력 구석구석을 덕질을 했었다. 알면 알수록 너무 멋진 사람 양조위. 우산 혁명 때 같이 시위에 동참하기도 하고, 유가령이 불미스러운 일을 겪었을 때 함께 옆을 지켜주기도 하고, 아직도 장국영의 기일이 다가오면 복숭아꽃을 보러가는 그. 또한 멈추지 않고 본인의 커리어를 쌓으며 올린 결과 지금은 홍콩을 대표하는 배우가 되었다. 베를린 영화제에서 공로상도 수상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에 그가 왔다. 그 해의 부국제 배우전은 바로 양조위였고, <무간도>부터 시작해서 그가 나온 작품들을 상영한다는 것이다. 비록 <무간도> GV는 표를 구하지 못했고, 이 때 부산국제영화제의 티켓팅 사고가 정말 크게 났어서 <암화>는 단체티켓으로 보러 갔었지만, 야외 무대 인사를 통해 그를 멀리서나마 보게 되었다. 이 때 이동진 평론가가 양조위에게 '눈빛'에 대한 얘기를 했었는데, 양조위가 이동진 평론가의 눈을 그대로 바라 보면서 대답을 했던 그 때. 정말 미친듯이 반했었다. 또 반했다. 그에게. 좌석에서 중경삼림 CD를 들고 소리지르던 나는, 양조위를 멀리서 바라보며 '내가 이 사람을 보다니'라는 생각에 그저 황홀해 하며 울컥했었다. 날 홍콩과 사랑에 빠지게 만든 사람, 날 홍콩 영화에서 못 헤어나오게 만든 사람, 아직도 기분 좋아지는 영화가 보고 싶으면 <중경삼림>을 틀게 만드는 사람.
그 덕에 홍콩은 나에게 익숙하면서도, 언젠간 꼭 떠날 곳이라는 예감이 왔고, 그 예감에 따라 비행기를 끊고 떠났다.
당시 회사를 다니고 있을 때라 회사에 캐리어를 끌고 도착했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는데, 출근길에 캐리어를 끌고 어디론가 가는 사람들을 보면 참 부러울 때가 많았다. 바로 내가 그걸 하게 되었다. 비록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할 때 화도 좀 나고, 출근 지하철이다 보니 캐리어가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까봐 다리 사이로 꽉 넣고 최대한 공간을 확보하면서 갔었지만, 그 출근길이 참 행복했었다.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 진짜 여행은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그 시작 전이 더 설레는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때 밤비행기를 었다. 그 때 보았던 수많은 별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진으로 전혀 담기지 않는 수많은 별들. 졸린 눈을 억지로 뜨면서 까지 보았던 별들. 수억년의 세월을 달려와 비로소 빛을 내며 나의 눈에 보이고 있는 별들. 그렇게 마카오에 도착해, 수많은 스타들이 있었던 홍콩으로의 첫 여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