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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주 Jan 18. 2023

주간일기 #2

23/01/16(월)


  일기를 쓰다 보니. 글쓰기를 시작해 보려니. 평범한 주부로만 살다가 40살에 등단했다는 박완서 작가가 또 생각이 났다. 나이 먹어가는 나에게 일종의 면죄부가 되어주는 일화랄까. 유튜브에서 박완서 작가에 대한 영상을 찾아보고 위키도 읽어보고 그랬는데. 등단 전 그저 평범한 주부로 살았는 줄 알았던 박완서 작가는 사실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해서 재학 중에 한국전쟁이 터져 학업을 중단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평범한 주부가 갑자기 작가가 된 것이 아니라 희대의 천재가 잠시 주부로 살았을 뿐이었던 것이었다.!


  여성 예술인들, 그중 특히 노년의 여성 예술인들에 대해 알아갈 때마다. 예를 들어, 윤여정의 엄마는 한국 최초의 보건교사였고, 윤여정의 동생은 LG그룹 최초의 여성 임원이었고, 김혜자의 아빠는 국내 2호 경제학 박사이자 재무부 장관을 역임한 사람이었다거나. 이런 사실을 알 때마다 신기하면서도 뭔가 허탈하고 못난 마음이 싹튼다. 가문에 새겨진 정신적 유산이 미천한 나 같은 사람은 결국 부모의 인생을 반복하게 될 뿐인 거 아닐까? 하는 그런 마음.




23/01/17(화)


  박완서 작가의 <한 말씀만 하소서>를 읽는다. 서칭을 하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사고로 숨진 아들을 보낸 경험을 회고한 수필인 줄 알았더니 그 당시에 절절한 마음에 신이라도 붙잡고 저주의 말을 퍼부으려 써 내려간 일기를 훗날 천주교 교지에 연재를 했고 해당 연재분을 엮어낸 책이었다. 1남 4녀 중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박완서는 비탄에 겨운 나머지 차라리 하나뿐인 아들이 아니라 딸들 중 하나가 그렇게 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 구절에 나는 몹시 놀랐다. 작가의 그 생각에 인간적인 공감이 가서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그런 생각을 감히 글로 옮길 수가 있다는 것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아무리 혼자 보려고 쓰는 일기라지만. 손가락질하는 것이 아니라 글은 정말 저렇게 써야 하는 것인가 싶어서. ㅇㅇ이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고 글도 소개했더니 보낸 링크를 다 읽어주고 감상을 나누어주었다. 이런 사람이 나의 연인이어서 감사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저녁은 오랜만에 친구 L을 만나서 함께 먹었다. 친구에게 너무 내 이야기만 주절주절 읊은 것 같아 헤어진 후 조금은 뒷맛이 개운치 못했다.




23/01/18(수)


  이 다이어리는 한 면이 3일 또는 4일로 분할되어 있다. 지난주 목요일부터 이 다이어리에 일기를 쓰고 있으니 이제 꼭 7일째 일기를 적고 있는데. 처음에는 3 분할된 이 줄만큼도 글자를 못 채울 것 같더니 어제와 그제는 머릿속에서 나오려는 글자가 넘쳐나는데 지면이 부족해 생각을 채 옮기지도 못하고 황급히 일기를 마무리해야 했다. 오늘부터는 다이어리에 애초에 인쇄되어 나온 날짜를 무시하고 그냥 쓰고 싶은 만큼 쓰려고 한다. 올 한 해 이렇게 쓸 수 있다면 이 다이어리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 같아 몰스킨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다가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깜짝 놀랐다. 그러다가 작년인지 재작년인지 아무튼 두어 번 회사 사람에게 받은 기억이 있는 스타벅스 몰스킨 다이어리가 기억났다. 받아서 겨우 한 두 페이지 끄적였거나 아예 펼쳐보지도 않은 채 사무실 자리 한편에 꽂아두었다가, 책상을 정리할 때 회사 짐을 담아둔 박스에 같이 넣어뒀었던 다이어리들이다.


  집에 들어와서 저녁을 대충 때우고 <한 말씀만 하소서>를 마저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오늘 일기에 쓰려고 했던 생각들이 손가락 싸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내 머릿속에서 사라질까 봐 그 생각들을 계속 되뇌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끝나자마자 처박아뒀던 다이어리들을 끄집어내 양껏 뿌듯해하고서는 내 알량한 생각들을 어서 빨리 일기장에 늘어놓으려고 책상에 앉은 것이다. 헌 박스 속에 들어있던 다이어리는 총 세 권이었다. 2019, 2020, 2021년. 공교롭게도 K 부장과 함께 일한 연도만큼의 다이어리가 있었네. 어쨌든 나에게는 고마운 사람이다. 이 다이어리들을 다 채울 때까지는 노트 걱정은 없겠다.


  작년, 재작년에도. 아니 사실은 잊을만하면 나는 다시 일기를 써보려는 시도를 했었다. 블로그에도 써보고, 종이에도 써보고. 일기를 쓰기 위해 장문의 지원서를 작성해서 브런치에 작가신청까지 제출해 브런치 아이디까지 개설했던 것이다. 하지만 번번이 빈 종이(또는 모니터) 앞에서 좌절감을 느끼며, 또는 그 할 말 없음에 놀라움과 뻘쭘함을 느끼며 '오늘은 친구랑 놀다가 밥을 먹었다. 참 재미있었다.' 류의 세 줄 일기나 며칠 적다가 시도를 접고는 했던 거다. 그런데 지난주 문득 박완서를 떠올리고, 박완서의 인생에 대해 알게 되고, 그녀가 쓴 글을 조금 읽고 나니 갑자기 생각이 머릿속에서 넘실댄다. 딱히 그녀의 인생이나 글에 감동했다거나 그런 것도 아닌데. 그냥 진짜로 책을 읽은 지가 너무 오랜만이라서 책을 통해 사고가 확장된다라는 그 뻔한 경험을 참으로 오랜만에 지금 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는 아들을 죽음으로 떠나보낸 작가의 비탄과 참담이 절절하게 기록된 글이다. 심지어 회고도 아닌 당시에 일기로 기록한 글이어서 엄청난 분노와 '포악'(작가 스스로도 여러 번이나 이렇게 표현했다)이 책의 절반 이상을 채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이 내 가슴을 때린 것은 당연하게도 작년에 있었던 고양이의 죽음 때문이다. 기골이 장대하고 잘생긴 얼굴에 연초록의 홍채를 가진, 윤기 나는 검은 털과 흰털이 적절하게 섞인, 다소 볼품없을 수도 있지만 오동통하고 귀여운 반토막 난 짧은 꼬리를 가진, 덩치에 비해 울음소리는 우승꽝스럽게 가냘펐던, 내 발치에서 자기를 좋아했던, 내 자식과 다름없었던 고양이는 작년 10월 나와 ㅇㅇ이가 보는 앞에서 심장마비로 비명에 숨을 거두었다. 그때 느낀 고통이 아직도 너무 선연해서 박완서의 책을 읽으면서도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려야했다.


  고양이의 죽음 이후 나는 영화나 드라마 따위에서 등장인물이 죽는 장면을 그 전과 같은 마음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영화 속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을 부둥켜안고 뺨을 어루만지며 꺼져가는 숨의 불씨를 되살려보려 애걸하는 행동들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화면 속 그들은 물론 연기를 하는 것이지만 내가 경험해 본 바로는 그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진심이며 진실이다. 내가 겪었기에 비로소 나는 안다.


  그러나 나는 그전에도 아빠를 떠나보냈고 더없이 사랑했던 할머니도 보낸 경험이 있다. 왜 이제야 더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에 절절하게 공감할 수 있게 된 것일까? 고양이는 내 자식 같은 존재였기 때문일까? 그래봤자 고양이이고 다른 동물이 떠나는 것도 숱하게 보았는데? 갑자기 명을 달리해서? 아빠의 죽음의 그 예고 없음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할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이 고양이를 사랑하는 마음과 다를 바는 없었을진대.


  공감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사람이 정녕 자기가 겪어보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진정으로 "공감"을 할 수 있을까? 하물며 똑같이 아빠를 잃었어도 내가 경험한 아빠와 동생들이 경험한 아빠는 다른 사람일 것이기에 우리는 같은 경험을 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가진 외할머니에 대한 추억과 내가 느끼는 외할머니의 죽음의 무게는 막냇동생이 느끼는 그것과는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박완서가 아직 살아있어 내가 이 책을 다 읽고 '나도 당신처럼 아들을 비명에 잃고 당신의 마음에 깊이 공감합니다. 내 아들 역시 준수하고 창창하고 젊었어요. 내 아들은 고양이였습니다.'라고 펜레터를 보냈다면 박완서는 "미친년" 하면서 내 편지를 찢었을 거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니 공감의 무게가 한층 무겁다. 나는 그동안 나의 공감능력 없음에, 특히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일에 대한 깊은 무심함에 스스로도 의아함을 가져왔었다. 그러나 작년 10월 전 후의 내가 이렇게나 다른 것을 보며, 공감이란 그만큼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겨우 한 편 읽었을 뿐인데 일기를 쓰면서 머릿속에 박완서의 문체가 아른거린다. 택도 없겠지만 뭔가 문체를 흉내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끔찍한 비탄을 써 내려가면서도 잃지 않은 실낱같은 유머와,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표현들을. 발 끝만큼 흉내라도 낼 수 있으면 전집을 여러 번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읽으면서 모르는 단어가 몇 개 있었는데 그런 건 사전을 찾아서 어딘가에 기록해 두어야겠다. 그리고 읽으면서 그 기발한 표현에 웃음이 났던 구절이 있었는데 ㅇㅇ이가 들어오면 바로 보여줘야지. ㅇㅇ이가 읽고 뭐라고 이야기할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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