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그대여 부서지지 마
바람 새는 창틀에 넌 추워지지 마
- 새소년, 「난춘」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eding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Memory and desire, stirring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Dull roots with spring rain.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T.S Eliot, 『황무지』
T.S Eliot의 『황무지』는 그 유명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시작한다. 그런데 4월은 왜 가장 잔인할까? 쿠마에의 무녀 시빌라는 아폴로에게 영생을 소원으로 빌지만 영원한 젊음을 빌지 않아 결국 호리병 속의 먼지가 된다. 그녀는 4월이 되면 힘차게 태동하는 생명을 견딜 수가 없다. 먼지가 되어 죽을 수도 없이 찬란한 봄을 바라만 보아야 하는 그녀에게 4월은 “가장” 잔인하다.
봄은 그래서 가장 잔인한 계절이다. 봄의 따뜻한 햇살, 피어나는 꽃, 몽글몽글한 감정들이 누군가에겐 그림의 떡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죽은 땅에서 피어나는 라일락이 ‘내가 아님’을 인식하고, 눈앞에 피어나는 수많은 라일락들을 어쩔 수 없이 봐야 하는 계절, 바야흐로 봄이다.
바람새 혹은 바람 새는
새소년이 2020년에 발표한 「난춘」의 ’亂‘(난)은 ’어지러울 난‘이다. 그러니까 「난춘」은 만개하는 라일락과 죽고 싶은 시빌라가 함께 존재하는 어지러운 봄에 대한 노래다. 가사를 찾아보기 전, 나는 이 노래를 전혀 엉뚱하게 이해했었다. “바람 새는”을 “바람새”로 들어버린 것이다. (‘바람새’는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고, ‘바람씨’의 북한어라고 한다!)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날개를 접고 창틀 앞 추위에 오들오들 떠는 “바람새”를 상상했다. 몹시 춥고 두려워 창틀 문턱을 넘는 것조차 버거운 “바람새”.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바람이 새는 창틀’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스운 오해지만 그 시절 내 모습은 사실 “바람새” 같기도 했다. 쥐고 있는 일은 많았지만 늘 준비되지 않았다고 느끼던 20대의 나는 창틀 앞의 “바람새”처럼 초조하고 불안했다. 다짐도 자존감도 쉽게 빠져나가던, 오늘 붙잡은 결심이 내일이면 창틈으로 새어나가던 시간.
오늘을 살아내고 우리 내일로 가자.
죽은 땅에서 라일락이 자라고, 추억과 욕망이 뒤섞이고, 봄비에 잠든 뿌리가 깨어나는 봄에 왜 더 많이 떨었을까? 누군가와 비교하며 모자람에 아파하던 나는, 창틀 너머 라일락을 보며 나 역시 라일락 뿌리임을 알지 못했다. 시빌라의 소원은 죽음이지만, 새소년은 우리들에게 노래한다 “바람 새는“ 창틀에 추워하지 말고, “오늘을 살아내고 우리 내일로 가자.”
봄을 앓는 우리들은 그러니까, 괜찮다. 내가 “바람새”임을 스스로 인정해도 괜찮다. 바람새에게는 날개가 있고, 한 줌의 용기만 있어도 날갯짓을 할 수 있다. 창틀 안에서 바람새는 날아오를 준비를 마칠 수도 있다. 바람 새는 창은 춥지만 그 틈으로 계절이 바뀐다.
흔들리는 20대를 지나 나는 30대가 되었다. 어지러운 봄을 앓았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봄은 여전히 잔인하지만, 용기를 내어도 괜찮다. “바람새”는 이제 “바람 새는” 창틀을 넘어 잔인한 봄 속으로 기꺼이 뛰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