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도 볼 수 없던 눈보라가 불 때
너는 내가 처음 봤던 눈동자야
- 검정치마 「Antifreeze」
어떤 태도로 남을 대해야 하는가는 자주 헷갈리는 것이다. 많은 성인군자들은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뺨을 내어주라 가르치지만, 우리의 자본주의는 착한 건 호구라고 말한다. 이유 없이 남을 돕고 싶다가도 무성한 사기 괴담을 떠올리며 이내 맘을 접고, 호의를 권리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보며 인류애가 차갑게 식기도 한다. 손해 보기 싫은 우리는 내 친절이 이용당할까 봐 늘 겁이 난다.
하지만, 정신없이 살다 보면 누군가는 꼭 이유 없는 호의를 선물해 준다. 가령, 생일날 전혀 생각지 못했던 지인에게 온 축하인사 같은 것 말이다. 굳이 시간을 내어 메시지를 보내 주는 마음은 몽글몽글하고 고맙다.
검정치마의 1집 수록곡 「Antifreeze」는 이런 기꺼움에 대한 곡이다. 「Antifreeze」에서 묘사되는 세상은 차갑다. 비만 내리던 하늘에 곧 눈이 내리고, 영화에서도 본 적 없던 눈보라가 분다. 그리고 이 차가운 세상에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너는, “내가 처음 봤던 눈동자”다. 타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따뜻한 온기로 둘러싸여 있을 때, 그 찰나의 순간이 온종일의 차가움을 녹여주기도 한다.
나의 첫 번째 기억은 달리는 버스에서 멀미를 했던 것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 나는 툭하면 멀미를 했다. 그날도 버스에서 멀미를 하는 바람에 옷을 다 버렸던 기억이 있다. 엄마는 급하게 내려 근처 시장에서 새 옷을 사 입혔다. 새하얀 티에 그려져 있던 자수가 아직도 잔상으로 남아있다.
이상하게도, 멀미하는 어린이가 일으켰던 작은 소동은 나에게 꽤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날은 당혹스러움 보다는 따뜻한 햇빛, 살짝은 차가웠던 공기, 새로 사 입었던 옷의 부드러움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나는 곧잘 멀미를 했지만 엄마가 그걸 나무랐던 기억은 없다. 속이 메스꺼워 달리던 고속버스가 잠시 멈춘 적도 있었지만, 싫은 소리를 들었던 기억도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에게 꽤 번거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도, 그날의 사람들도 속이 불편한 어린이를 기꺼이 도와주고 이해해 줬다. 적어도 싫은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날의 기억이 악몽이 아닌, 따뜻함으로 남아 있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인생의 첫 번째 기억이 누군가의 다정함이라는 것은 꽤 힘이 된다. 살다 보면 눈보라 같은 날이 찾아오지만, 이따금씩 따뜻한 순간들을 공유하기도 한다. 나의 첫 번째 기억 같은 것들처럼 말이다.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
얼어붙은 아스팔트 도시 위로
세상은 여전히 손해 보는 걸 참지 못하고, 모든 행동에 경제적 잣대를 들이민다. 잘해주고 돌려받지 못할까 봐 우리는 전전긍긍한다.
하지만 그렇게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오늘 나에게서 출발한 호의가 내일 다시 되돌아오지는 않더라도, 멀리멀리 돌아 서로의 하루를 데울 수는 있다. 잠깐의 안부, 먼저 건네는 인사, 응원의 한마디 같이 방법은 간단하다.
그래서 검정치마는 노래한다. “숨이 막힐 것 같이 차가웠던 공기”에도 “너의 체온은 내게 스며들어” 온다. 차가운 세상이지만, 서로의 다정함이 돌고 돌아 언젠가 다시 서로를 향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어쨌든 타인에게 열려있다. 춤을 추며 절망과 싸울 수 있는 것은 세상이 아무리 차가울지라도, 다정한 시선이 우리에게 있는 까닭이다.
그러니까, 서로에게 조금 더 다정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