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반도 더 남은 엄마들에게
아이들이 어렸을 땐 어떤 영역이든 평가기간이 되면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엄마도 옆에서 함께 시험을 준비했고, 잘 치러내고 난 다음엔 뿌듯함과 후련함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아이들의 학령이 높아질수록 아이들과 부모들의 부담감도 커지고,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좌절과 낙심을 하는 경험도 하게 됩니다.
수험생의 엄마로 살았던 올 한 해. 저에게는 유독 더디게도, 때론 바쁘게도 흘러갔던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처음이고 낯설고 어려웠던 시기였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은 한 순간을 꼽으라면 수시접수를 끝냈던 그날 밤이었습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누가 뭐래도 성실하게 수시러로 살아온 아이라서 더 많이 긴장되고 떨리고 어떤 선택지를 골라야 가장 리스크가 적을지 자꾸만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서를 각자 집에서 직접 작성해야 한다는 사실에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고요. 사실 저는 대학 입시원서도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다 직접 써주시는 건 줄로만 알고 있었다죠.
교육 관련 업계에서 오래 일을 하고 있었음에도 대학입시 앞에서 초보 수험생의 엄마로 생소하고 낯선 것 투성이었습니다.
내 앞에 직접 맞닥뜨려야만 알게 되는 것들도 참 많은 것 같아요.
제 아이는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고 남은 시간 동안 공부에만 전념하자 라는 마음으로 눈치작전 같은 거 없이 한 번에 원서접수를 하겠다고 해서 아이와 같이 첫날에 모두 접수를 했습니다. 아니 사실은 아이가 혼자서 다 작성하고 저는 접수비 결재만 해줬지만요. (학교별 원서접수금액들이 생각보다 비싸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수시원서 6장을 쓰니 그 금액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결재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접수가 되고 그 이후엔 변경할 수 없는 거라 그 순간엔 저도 모르게 괜히 마음이 쿵쾅거리고 떨리더라고요. 기록해 둔 원서내용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확인했는지 모릅니다.
왠지 조금 긴장되어 보이는 아이에게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경쟁률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열심히 공부만 하면 돼" 라며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다음 날, 그다음 날에도 저는 아이 몰래 접수 마감된 대학 경쟁률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그랬답니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쫄보인증을 한 셈이죠. 우리가 접수한 대학의 경쟁률 숫자가 오른 걸 보며 제 마음도 오르락내리락.
주변상황에 많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수험생의 엄마가 되고 보니 세상 나약한 사람이 된 것 같았습니다.
늦은 밤에 잠이 들고, 이른 아침엔 힘겹게 일어나는 수험생 아이는 지치고 피곤해도, 나태해질 권리도 없이 하루를 버텨야만 했지요. 그런 아이의 힘듦을 바라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다정함과 따뜻함을 담아 매일매일 안아줘야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어디에선가 " 힘이 들 땐 너를 잘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라"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몸이 상하거나, 마음이 상하게 되는 일을 만날 때 억지로 힘을 내어 극복하려고 하기보단 일단 그저 나를 잘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일에 마음을 쓰라는 저 한 문장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무조건 공감한다는 마인드로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적어도 하루 세 번 식사시간 만이라도 맛있고, 즐겁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최선을 다해 아이의 밥상을 준비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매일 내 소중한 아이를 위해 기도합니다. 스스로 바라고 계획한 목표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길이 너무 버겁지 않기를, 그리고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의 학교가 가장 안전하게 실패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그리고 집에선 아무리 무거운 삶의 짐도 기꺼이 편안하게 내려두고 쉴 수 있는 곳이 되기를, 엄마인 나는 기꺼이 그 품을 열어내어 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오지 않을 것만 같은 시간이 다가왔고, 드디어 수능이 끝났습니다.
매 시간시간 시험이 시작될 때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문제를 읽기 시작했다는 아이는 맘고생을 많이 했던 탓인지,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건지 집에 와서 펑펑 눈물바람을 합니다.
늦은 밤 가채점표를 가지고 체크를 해보니 예상치 못했던 반전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큰 실수는 없이 잘 보고 온 듯했고.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이전처럼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서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기도하며 기다림의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습니다.
하루, 이틀, 삼일 시간이 지나갑니다.
내 아이의 중대한 일이 지나고 나니 괜스레 허전한 마음이 듭니다. 분명히 내 삶인데, 내가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내 속에 꽉 채워져 있던 것들이 내 허락도 받지 않고 스르르 빠져나간 것 같아 그 가벼움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언가 나를 채우고 싶다는 생각에 걷기를 시작합니다. 마침 다이어트가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니.
꾸준하게 걷기를 한다고 해서 드라마틱하게 살이 쏙 빠지고 그런 건 없지만, 집안에 있는 것만 좋아하는 집순이였던 제가 일단 집밖으로 나가게 되는 기회가 되었고요. 걷기를 시작하면서 소화기능도 좋아지고 조금 더 활력이 생기기도 하고요
또 걸으면서 음악도 듣고, 제 삶에 도움이 되는 강의들을 듣기도 하고요, 아무것도 듣지 않고 그냥 걸을 땐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고민하던 것들이 정리가 되기도 하고 좋더라고요.
가끔씩은 중간지점에 있는 카페에 들러 좋아하는 차 한잔씩 마시고 오는 날도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추천하고 싶은 것은 독서.
책을 읽다 보면 내가 생각지 못했던 세상을 만나기도 하고, 뭔가 의욕이 생기기도 하고, 때론 위로와 용기를 얻기도 하고 또, 우리를 성장하게 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되는 것 같아요.
세 번째로는 아주 오랫동안 고민만 했던 일이었는데요. 영어공부를 시작했답니다.
책 읽고, 독해하는 영어 말고, 무조건 암기만 하는 영어 말고, 말하는 영어를 하고 싶어 져서 말이죠. 회화학원에 등록을 하고
거리가 조금 있는 곳이라 비대면 수업을 신청해서 영상강의를 들으며 과제제출하고 피드백을 받는 방식으로 공부하고 있는데요, 재미있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고 아직은 그렇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그래도 내가 완전 기초는 아니지 않나?' 생각했었는데요. 말하기를 위한 문법공부를 다시 하다 보니 저는 기초 중의 왕기초 수준이었던 걸로요. 큭큭
매일밤 공부하며 입으로 중얼중얼하는 엄마를 우리 아이들도 많이 응원해주고 있고요 이제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왕기초반 수업도 마무리가 되어갑니다. 다음 달은 실전 초급반으로 갑니다. 너무 우습죠. 한 달 공부 후에 초급반으로 승급하다니.
40대 후반을 향해서 달려가다 보니 나이 든 이후의 내 삶에 대해서 조금씩 더 많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지금부터 열심히 준비하면 50대엔 조금 더 빛나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기대도 해봅니다.
제가 우리 아이에게 "엄마가 나이 들어 공부하는 것이 나중에 얼마나 잘 쓰일지 모르겠네, 너무 늙은 나이에 시작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하면서 말끝을 흐렸더니
"엄마 요즘은 보험도 120세까지 보장해준다잖아요. 엄마는 아직 반도 안 살았어요.. 열심히 해봐요"
아이의 말에 웃음으로 답하긴 했지만 괜히 위로가 되고 든든하기도 하더라고요. 이전에 내가 했던 것처럼 꼭 같은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다시 응원을 받고 있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예전에 한 강사님이 엄마들이 나이가 들어 공부를 시작하면 그것이 스스로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자존감 지지대가 된다고 얘기해주셨던 게 생각이 납니다.
그동안 고생했던 수험생 맘님들. 혹은 수험생엄마를 시작하시는.분들.
언어든, 취미에 관련된 것이든 운동이든. 평소 관심 두었던 것들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배워보는 건 어떠세요?
우리. 아직. 인생의 반도 안 살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