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포기할 수 있다면.
삶이 허무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이 무서웠다. 열심히 살기만 하면 어떻게든 사는 건 줄 알았는데 별 징조도 없이 서른둘에 과부가 됐다.
무언가를 붙잡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절박함으로 사주카페를 찾아갔다. 대단한 걸 기대한 건 아니었다. 지옥 같은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면 그 무언가가 무엇이라도 좋았다.
신내림을 받았다는 사주카페의 주인은, 부드러운 인상의 아주머니였다. 내가 생년월일시를 부르자, 그녀는 방울을 흔들며 능숙하게 내 사주팔자를 짚었다.
"인복이 없네, 다 내가 먹여 살려야 하는 팔자야.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사주가 소녀 가장이야."
인복이 없다는 그녀의 말은 틀렸다. 내 주변엔 자주 좋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 덕분에 어려운 시간들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무심상한 사주풀이를 듣자 나는 격한 외로움이 밀려와 목이 메었다. 그녀는 곧이어 내게 결혼을 했냐고 물었고, 결혼을 했다면 남편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 성격이 보통 까탈스러운 것이 아닌 데다가 웬만한 남자랑은 잘 지내지 못할 거라고 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내가 큰 사고로 남편과 사별한 지 얼마 안 된 것을 알게 된 그녀는 저조차 눈물을 훔치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나는 배 속에서부터 터져 나온 울음을 쏟아내다가,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물었다.
"제가, 재혼을 할 수 있을까요? 하게 된다면 언제쯤 하게 될까요?"
그녀는 살짝 당황했다.
"일부종사는 못할 팔자라, 평생 혼자 살진 않을 거야. 빠르면 3년, 늦어도 5년 안엔 재혼하겠어."
"제가...."
나는 먹먹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제가 지금 이런 말을 해서, 그 사람이 슬퍼할까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아직 여기에 있을 텐데."
그 사람은 슬퍼했을 것이다.
내가 저를 그리 쉽게 잊고 새 삶을 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 만질 수도 안을 수도 없는 나를 앞에 두고, 어찌 위로할 줄을 몰라 슬펐을 것이다.
그는 그때, 그 언젠가의 이별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의 자취방 앞에 서서 제발 문을 열어달라며 훌쩍이던 스물한 살 여자애를. 그가 입대할 때쯤, 우린 헤어졌다. 그가 말을 꺼냈고, 나도 동의했다. 그리고 곧바로 후회했다. 그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으나 그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어려서 순수했고 뭘 몰라서 절절했다. 나는 정말 열병을 앓았다. 이마가 펄펄 끓었고 선득하고 으슬한 추위를 느꼈다. 그렇게 하루 이틀을 앓고는, 이별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얼마 뒤 그는 군에 입대했다. 몸에서 멀어져 마음도 곧 멀어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도 잊히지가 않았다. 영영 잃고 싶지는 않은 욕심에 친구로 남아보려 한 것이 문제였다. 보초를 서다가 달이 뜬 걸 보고 내 생각이 나서 몰래 전화를 했다는데, 그게 뭐 하자는 건지. 첫 휴가를 나온 그를 만났을 땐 오히려 한창 연애 중일 때보다 더 설렘을 느꼈다. 별 수 없이 우린 다시 만났다. 눈에 뭐가 씐 건지, 도무지 그만 한 사람이 없었다.
나는 취향이 한결같은 사람이다. 배스킨 라빈스 서른한 가지 맛 중에서도 바닐라만 먹는다. 신중하게 다른 맛을 고르고도 역시나 바닐라를 먹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은 어디에나 있는데, 그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났다. 재혼은커녕 연애도 못했다. 누굴 만나려고 피나게 노력을 해도 만날 수 있을까 말까 한 처지에 집, 회사 말곤 딱히 동선이 없기도 했다. 평일엔 회사고, 주말엔 아이다. 여태 그와 맞춘 결혼반지를 끼고 다니며 그로부터 오는 안정감과 소속감을 버리지 못하는 내 유약함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의문이 든다. 평생 혼자 살고 싶은 건 아닌데 그 사람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면 안 되고, 내 상황에 그런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가볍게 연애만 하는 성격은 못 되는데, 그렇다고 재혼하기엔 장점이 별로 없다. 과연 나는 죽기 전에 연애나 할 수 있을까?
누군가와 공감을 나누고 신뢰와 애정을 쌓아가는 일은 결혼생활 최대의 행복이었다. 그 달콤함을 알아서 쉽게 포기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제 나는 사랑에 환상을 가진 이십 대도 아니며, 무엇보다 소중한 아이가 있어 한 걸음 더 신중해진다. 아이에게 온전히 가야 할 애정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순간 내 아이가 엄마까지 잃었다는 기분을 느낄까 봐 오싹해진다. 아직까진 이 아이에게 내가 세상의 전부이므로 그 세상을 더 오래 지켜주고 싶다.
....사실 나는 지금 연애조차 못하고 있어 그 세상은 자연스레 지켜지고 있다. 나는 불필요한 걱정을 많이 하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