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다르게 반응한다.
누군가에게는 혹은 어느 세대와 문화에서는 예민함이 까탈스럽다는 이유로 잘 받아들여지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생김새가 다르듯 사람마다 직감과 본성의 결 또한 다르다. 그래서 무언가에 반응하는 것도 제각각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반응하는 것을 예측할 수도, 미리 대비할 수도 없다.
신은 결코 침묵하지 않는다.
늘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형태로든 신호를 보낸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은 그 미세한 떨림 하나도 알아차리지만, 무감각한 자는 강력한 신호조차 듣지 못한다.
신호를 듣고도 외면한다면, 그것은 결국 나의 책임이다.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신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고 강력한 신호를 나에게 보내왔다. 신은 맡은 바 역할을 다했다. 신의 은총과 암시가 있는 한, 어떤 것도 내가 자연이 정해놓은 길을 따라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만일 때때로 내가 그 길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나의 탓이며 신의 명백한 지시를 보지 못한 탓이다.” (주1)
신앙 역시 ‘반응’이다.
항상 예민하게 깨어있어야 한다.
무감각한 영혼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일하신다.
하지만, 그 방식과 때는 우리가 생각하거나 예측할 수 없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을 통해,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말씀하시기도 한다.
문제는 우리가 깨어있지 못하면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그 분의 손길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가장 필요한 것은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하며, 두번째는 나의 기준과 잣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일을 내 기준과 잣대로 판단할 때,
나는 그분이 이미 내 삶에 오셨는데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가 된다.
하나님은 때로는 약하고 힘없는 자의 모습으로, 내가 준비되지 않은 순간에 찾아오신다.
그러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는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만이 아닌 가족, 주위 사람들, 지역 공동체에 사랑과 관심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
“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더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마태복음 11장 16:19>”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못하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못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지 못하는 무감각한 영혼이 되어서는 안된다.
언제 어느때든 깨어 있으라. 그리고 내 머리로 판단하지 말라.
나를 내려놓고 마음을 열어,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라.
그리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라.
순종은 ‘깨어 있음’의 열매다.
내게 주어진 상황이 불편하고 어렵더라도,
그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감사하며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은 그 마음 안에서 일하신다.
“그러므로 깨어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지는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태복음 24장 42절>” Therefore keep watch, because you do not know on what day your Lord will come.”
주 1> 황제의 철학,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종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