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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리아 Mulia Jun 24. 2021

추억은 아름다워

80년대 걸스카우트 활동을 떠올리며...

어릴 때부터 내성적이고 나서기 싫어하고 낯도 참 많이 가렸던 아이...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건 너무 부끄럽고, 긴장하면 손에서 땀부터 났으며 말이 별로 없는 새침데기 인상이어서 학기초에는 늘 친구들의 경계대상이었던 아이... 그게 어린 시절의 나였다. 지금도 나서기 싫어하고, 사람들 많은 자리는 되도록 피하려고 하는 그런 성격이 전혀 없진 않지만 어린 시절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이룬 나다. 혼자서 씩씩하게 밥도 잘 먹고, 아니다 싶은 일엔 용기 내서 말도 할 줄 알게 되었고, 첫인상에 대한 오해를 풀고자 친구들에게 늘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던 나의 끊임없는 노력에 의한 결과인지 아니면 아줌마가 되어 그런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젠 내 첫인상을 까칠하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언제부터 점점 바뀌게 된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국민학교 3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활동했었던 걸스카우트 활동 덕분이 아닐까 싶다. 국민학교 3학년의 어느 날... 학교에서 선생님이 걸스카우트 모집 안내를 하시고 신청자를 받았었는데 그때 난 그게 뭔지 모르니 신청도 안 하고 남의 얘기처럼 신경 쓰지도 않았었다. 집에 와서 엄마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하다가 걸스카우트 얘기를 했더니 엄마가 왜 신청 안 했냐면서 당장 다음 날 학교에 가면 선생님께 걸스카우트를 하겠다는 말씀부터 드리라고 했다.


난 별로 관심 없는 듯 얘기했는데 엄마의 격한 반응에 다소 놀라기도 했지만, 어린 시절엔 말 잘 듣는 딸내미이기도 했으니 엄마가 시키는 대로 일단 신청을 했다. 어찌 보면 내 의지보다는 엄마의 의지로 시작된 걸스카우트... 그렇게 뭣도 모르고 신청을 한 후에 시작된 스카우트 활동이었다. 지금은 학년별로 부르는 명칭이 다양해진 것 같던데 당시엔 개나리와 진달래 딱 두 그룹만 있었다. 크게는 1대와 2대로 나누고 각 대 밑에 여러 개의 보... 5, 6학년 선배 언니들이 각 보의 보장을 했던 것 같은데 희미한 기억이라 여기까지만... 어찌 됐건 그렇게 어리바리 시작했던 스카우트를  6학년에 들어가면서 최고 학년들이 맡는 대대장, 1 대장, 2 대장 중에  내가 2 대장을 맡았었으니 내 성격 변화에 스카우트 활동이 일조한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개나리반 때는 솔직히 별로 좋지 않았다. 당시 5학년 언니가 보장이었는데 얼마나 무섭게 하는지 이름은 잊었지만 얼굴은 똑똑하게 기억한다. 어른이 되어 생각하니 5학년이나 3학년이나인데, 그 언닌 정말 무서웠다. "돕자"라는 스카우트 구호를 외칠 때 같이 들어야 하는 손가락 모양을 바로 잡아 줄 때도, 보별 활동을 할 때도 나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많이 혼났던 기억이 있다. 특히 1박 2일 야영을 하면, 캠프파이어 행사 때 각 보별로 장기자랑 발표를 해야 하는데, 동요인 "동물농장"의 동물 울음소리를 외국어로 바꿔서 부르는 걸 시키면서 어찌나 혼을 내던지... ㅎㅎ 예를 들어 가사 중 '외양간에는 송아지, 음매~~''외양간에는 미국 소, 헬로~~' 뭐 이런 식인데 그 울음소리가 마음에 안 든다며 다시 다시를 반복... 그 언니 지금 어디서 뭐하고 살려나... 


그래도 당시에는 스카우트 활동을 하러 모이면 참 좋았었다. 방과 후에 교실로 가면 단복을 차려입으신 선생님들이 기다리고 계셨고 교실수업 때도 도움되는 여러 가지 교육을 했었다. 그중 기능장 따기는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뜨개질도 했었고, 삼각건 사용 방법, 안전교육, 응급처치 등등 여러 가지를 배워서 평가를 받은 후 그것에 대한 인증으로 받는 기능장! 어깨띠에 붙일 기능장이 하나씩 늘어나면 그게 그렇게 뿌듯하고 좋을 수 없었다.

얼마 전 옷 정리를 하다가 곱게 싸 놓은 스카우트 용품들을 다시 꺼내 봤다. 지금은 단복도 이런 갈색이 아니던데... 다른 건 다 버리고 없는데 기능장, 삼각건, 그리고 줄 조임은 잘 보관 중이다. 개나리 진달래 배지도 있었는데 녹이 슬어 빼 버리고 멀쩡한 배지만 남겼던 것 같다.

소중히 모은 기능장들!! 이것보다 더 많이 모은 친구들도 많았지만 어쨌거나 나 스스로 뭔가를 해서 받은 기능장이라 개수와 상관없이 기분이 좋았던 것 같고 한 가지 활동이 끝날 때마다 선생님께 받았던 칭찬은 더 좋았다. 교실 활동뿐 아니라 야외 활동도 마찬가지... 학교에서 1박을 하는 야영도 기억에 남고, 텐트를 치고 운동장에서 자거나 학교 교실에서 침낭을 들고 와 잠을 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삐거덕거리고 왁스 냄새나던 교실 마룻바닥, 밤에 친구들과 자는 게 마냥 좋아서 귀신 얘기하며 속닥거리던 일 모두...


여하튼 어린 시절의 스카우트 활동으로 내성적인 성격이 점점 좋은 방향으로 바뀌게 되었고, 나름 성실히 하다 보니 학년이 올라가면서 보장도 하고 2 대장까지 하게 되었다. 그때도 물론 나서서 뭔가를 하는 게 썩 편하진 않았지만 책임감으로 했었던 것 같고, 그렇게 불편한 걸 견디다 보니 사람들 앞에서 말할 때도 전보다는 덜 부끄러웠다. 지나고 생각하니 엄마는 내 소심한 성격 때문에 스카우트를 시키셨나 싶기도 했다. 대학원 졸업 이후에는 크게 남들 앞에서 발표를 한다거나 그런 일이 거의 없는 데다 이젠 내가 싫으면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을 만큼 나이를 먹었으니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짝 찌그러져 있는 지금의 상태가 편한 건 사실이다.


어린 시절 걸스카우트에 대한 좋은 기억 때문에 나도 아이를 키우면 꼭 스카우트 활동을 시켜야겠다 마음먹었었다. 그리고 큰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학교에 스카우트 신청이 있길래 봤더니 보이스카우트가 아니고 컵스카우트였다. 당시 신청 가능했던 활동 단체가 컵스카우트, 아람단, 우주소년단인가 뭐 그랬던 것 같은데 아들에게 컵스카우트를 해 보라고 제안하고 신청서를 낸 뒤 기쁜 마음으로 단복까지 다 준비했었다. 그때도 저 기능장이 달린 어깨띠들을 보여주며 엄마가 예전에 이런이런 것들을 했었다면서 옛날 얘기도 헤 주고...


그렇게 시작한 아들의 컵스카우트 활동... 그런데 1년을 지켜보니 우리 때 같은 교육활동은 전혀 없는 듯했고 단체로 놀러 가는 듯한 활동만 많이 했다. 봉사와 나눔, 스스로 알아서 하게 하는 스카우트 정신이 길러지기는 커녕 아이도 그저 친구들과 놀러 가는 일로만 생각을 했다. 내가 너무 기대가 컸는지 그만큼 실망도 커서 결국 1년 활동으로 끝내고 다음 해에는 신청하지 않았다. 거금 들여 산 단복도 몇 번 입어보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남의 아이에게 물려주고... 옷을 넘겨주면서 아들도 배지는 갖고 있겠다며 보관한 것 같은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다. 학교마다 사정은 좀 다를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거나 아이에게 스카우트의 좋은 활동들을 경험시켜줄 수 없어서 엄마로서 많이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 내가 국민학교 다니던 그 시절에는 스카우트를 할 수 있었던 일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나 싶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제복이 주는 소속감도 느끼며 활동도 제대로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두 살 아래의 동생도 당연히 보이스카우트를 했었다. 감색 제복에 노란색 항건을 목에 두르고~~

사진출처 : 나무 위키
사진 출처 : 나무 위키

나무 위키의 저 사진도 내가 입던 단복보다는 훨씬 뒤의 사진 같은데 암튼 저런 원피스 형태의 단복이었다. 스카우트 활동이 있는 날이면 입고 가던 갈색 원피스 단복과 빵모자, 반타이즈 그리고 어깨띠... 친정에 있는 옛날 앨범을 뒤지면 분명 걸스카우트 단복 입은 사진들이 있을 텐데, 갑자기 찾아보고 싶다.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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